학부 전공이 심리학이었기에 나는 MBA 수업을 듣기 전에 회계, 경제, 등등 경영학 사전 필수 과목을 다 듣는데 1년이 걸렸고 졸업하는데 거의 3년이 걸렸다. 일곱 개의 잡을 가진, 학교에서 가장 바쁜 학생으로 뛰어다니면서 아니 자전거로 캠퍼스를 누비고 다녔었는데, 저녁에 Chick Fila에서 일이 끝나면 이제 Shin이 나를 데리러 와주었고 친구들은
He’s cute!
하며 놀렸다.나한테 관심이 있었는지 매일 Chick Fila에 찾아와 말을 걸던 백인 남자애도 나를 기다리는 Shin을 보자 다음날부터 나타나지 않았다. 저녁 타임이라서 치킨 너겟등 팔리지 않은 음식을 싸서 주면 Shin은 너무 좋아했다. 차가 없던 뚜벅이 었던 나에게도 차가 생겼는데 Shin이 보증을 서서 차를 살 수 있었다. 대학원 조교라서 학비가 나왔고 수업이 없는 여름에도 대학원 웹마스터 일을 계속했기에 여름이면 부자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IMF 여파로 학교에서 그 당시 타격을 받은 아시안 나라들에서 온 학생 중 2명을 뽑아 무이자 학자금을 주었다. 조건은 졸업 후 2년 후부터 갚는 거였다. 운 좋게도 Shin과 내가 그 2명으로 뽑혔고 우리는 이미 장학금을 받고 있었기에 나는 그 학자금으로 차를 샀고 Shin은 자신의 차 Honda 어코드의 남아있던 잔금을 지불했다. 돈 없는 학생들에게 주는 학자금인데 차값을 낸다며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친구들에게 부러운 빈축을 사기도 했다. (졸업 2년후에 이 4천불을 갚느라 우리는 뒤늦은 후회를 하기도 했다)
나는 특이한 옷을 좋아해서인지 나름 학교에서 패셔니스타였는데 특히나 흑인들한테 인기가 많았다. 한 번은 캠퍼스에서 걸어가고 있는데 나한테 풋볼 선수보다 덩치가 더 큰 흑인 남학생이 거의 달려들듯 오더니
You’re so cute!
해서 나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도망가기도 했다.
MBA 에는 외국인 친구들도 많았는데 콜롬비아에서 온 Javier는 나를 Miss Kimchi라고 불러 내가 질색을 했다. 그런데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나? 고3 입시를 친 후에 초등학생 6학년 남동생한테 도시락을 가져다주다가 여자 친구로 오해받았을 정도로 형편없이 동안이었던 탓에 Javier는 MBA 수업에 앉아있는 날 보고 고등학교를 건너뛴 천재인 줄 알았다나? 내가 대학교도 재수를 했다고 하니 천재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잖아. 하며 정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케팅 수업에서 팀 파트너였던 Henry는 나이지리아에서 온 친구였는데 아버지가 석유 산업을 하는 갑부집 아들이었다. 성격이 유쾌하고 재밌었지만 뺀질뺀질한 성격이라 팀 파트너로는 그리 좋은 파트너는 아니었다. 아직도 미국에 있을지 궁금하다.
한국에서 온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 H가 Henry랑 엄청 친한 친구였는데 영어 실력이 원어민 같았던 똘똘했던 탐보이었다. 늘 내가 공부를 안 했다고 하면서 시험 점수는 항상 잘 나온다며 정말 언니가 공부를 안 하는지 집에 카메라를 설치해야겠다고 투덜대곤 했다. 난 정말 거짓말은 못하는 성격인데 MBA 시험은 항상 논술형이었고 쓰는 거라면 뭐든 길게 썼던 나였기에 가산점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H와는 웃픈 사연이 있는데 학교에서 Spirit of the Tiger라는 한국 전시를 한국학생 대표로 함께 준비했었다. H가 회장, 내가 부회장으로 준비를 했는데 신문사에서 취재를 왔었다. 나는 동생이 한국에서 보내준 화려한 블라우스를 입고 한껏 꾸미고 나가서 H와 함께 사진도 찍었는데 며칠 후 나온 신문을 보고 난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신문 앞표지에 대문짝만 하게 나온 사진에 H가 해맑게 웃고 있었고 내 모습은..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H의 팔을 잡고 있는 내 손만 사진 끝트머리에 나와 있었다.
한껏 기대에 차 신문을 펼친 나를 보고 Shin은 박장대소를 했고 몇 주를 놀려먹었다.
신문에 나온다고 동네방네 아니 한국에까지 자랑했는데 이게 무슨 창피란 말인가.
그 기자는 한술 더 떠서 다른 페이지에 한국 교수님들과 찍은 사진에 내 이름을 H라고, 그 동생의 이름을 떡하니 넣은 것이다. 그 기자는 나와 무슨 억하심정이 있었길래 사진은 빼고, 이름도 다른 사람으로 둔갑을 시켰던 걸까?
그 똘똘하던 H는 미국에 남고 싶어 했지만 끝내 취직이 되지 않아 한국으로 돌아갔었는데 아직도 한국에 있을지 어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경제학이나 회계학은 정말 적성에 맞지 않았지만 마케팅 수업은 그야말로 공부가 이렇게 재밌다고? 할 정도로 신나게 들었다. 프레젠테이션 때는 비싸게 30초짜리 tv 광고 비디오를 주문해서 틀기도 했었는데, 유튜브도 없었던 참 옛날이야기다. 나는 내가 미국에 진짜 온 이유, 광고를 하기 위해 애틀랜타, 뉴욕에 있는 수많은 광고대행사에 이력서를 보냈지만, 한국에서 카피라이터의 경력은 인정되지 않았고 나는 할 수 없이 광고회사가 아닌 일반 회사라도 일단 취직을 해보자 싶어 학교에 인터뷰를 오는 회사에도 지원을 했다. 바로 미국의 최대 유통업체 중 하나인 Target corporation이 바로 내가 지원한 회사였다. 한국의 이마트 같은 대형 슈퍼마켓인데 슈퍼타깃은 식료품도 함께 취급한다.
미국 아줌마들이 제일 좋아하는 가게가 바로 이 타겟이다. 소셜 미디어에 타겟을 너무 사랑하는 아줌마들의 이야기들이 한가득하다. 2023 기준 Fortune 500에 32위에 올랐으니 그야말로 미국을 대표하는 유통업체인데 나는 마침 MBA 수업에서 회사를 분석하는 과제에서 타겟을 선택했었기에 인터뷰에 자신이 있었다.
Target 인사과에서 나온 면접관들은 타겟에 대해 술술 말하는 나를 보더니 자신들보다 내가 오히려 타겟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며 혀를 내둘렀고, 인터뷰에 좋은 점수를 얻은 듯했다. 1차 면접에서 30명 정도가 합격을 했고 2차 면접이 한 달 후에 이루어졌고 15명 정도가 합격을 했다. 그리고 3차 면접에서 6명인가가 합격을 했던 것 같다. 정확히 몇 번의 면접을 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무려 6개월에 걸친 여정이었다. 나는 운 좋게도 마지막 합격 3인에 포함이 되었고 인터내셔널 학생들 중 제1호 취업자가 나왔다며 모두들 나를 축하해 줬다. 외국인이었기에 해결되어야 할 비자 스판서 문제를 확실히 해두어야 했기에 나는 면접관들에게 H1 비자 (취업비자)를 내주냐고 물었고 면접관들은 당연히 내준다고 했다.
마지막 합격자 3인 중 나만 유일하게 외국인이었고 우리 셋은 타깃 본사가 있는 애틀랜타에 초대돼서 적성검사를 했다. 모든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회사에서 나오는데 나는 확실히 해두자 싶어 본사 인사과 담당자에게 다시 한번 H1 비자에 대해서 물었다.
그랬더니 인사과 담당자 왈,
아니, 우리는 회사 규정상 외국인에게 스판서를 해주지 않아.
뭐라고?
아니 도대체 내가 말을 똑바로 들은 건가?
회사 규정상 스판서를 해주지 않는다니? 그럼 6개월 동안 나한테 자신 있게 스판서를 해준다는 면접관들의 말은? 그들은 타겟처럼 큰 대기업이 당연히 스판서를 해줄 것이라 지레짐작만 했던 것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나는 푹하고 쓰러졌고, 나머지 합격자 2명은 나를 부축하며 나를 향해 애처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의 피 같은 6개월이 헛수고로 사라져 간 순간이었다.
나는 학교에 돌아와서 타겟 불매 운동을 하고 싶었다. 외국인들을 고용하지 않는 아주 못된, 국수주의 회사라고 마구마구 험담을 하고 다녔다.
그 후로도 학교에서 Job Fair 가 있을 때마다 회사에서 나온 인사과 사람들에게 비자에 대해 물어보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에게 이런 농담 같은 조언을 하기도 했다.
미국인과 결혼하는 게 제일 빨라.
나는 닥치는 대로 수없는 회사와 면접에 면접을 봤지만 H1 비자를 내주는 회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졸업은 다가왔고 Shin은 학부를 마치고 애틀랜타에 있는 Georgia State University로 Computer Science 대학원을 진학하게 되었고, 우리는 한국에 들어가서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든 후다닥 결혼식을 올렸다. Shin의 청혼은 없었다.
나는 첫딸이라 유독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는데 동생들에게는 채벌도 하셨지만 나는 아버지한테 야 단 한번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하신 아빠가 국제 전화를 하셔서 내게 호통 아닌 호통을 치셨다.
아빠의 친한 친구의 막내딸 결혼식에 가신 아버지는 미국에서 (그 당시) 결혼 적령기에 결혼은 안 하고 공부만 하고 있는 내가 못마땅하셨던 거다.
친구의 첫딸도 아니고 막내딸의 결혼식에 가셨던 아빠는 화가 단단히 나셨고 국제 전화로 내게 그 화를 푸셨다. 다음날 Shin에게 아빠 얘기를 했고, Shin이 부모님께 전화를 했고, 그렇게 양가 부모님은 자식들 없이 상견례를 하셨고, 우리는 몇 달 후 결혼날을 잡았다.
아빠가 청혼을 한 셈이 된 것이다.
한국에서 내 결혼 준비를 한 건 내 여동생이었고, 나는 정말 몸만 갔다 다시 몸만 돌아왔다. 동생이 예식 장소며, 드레스, 신혼여행 모든 것을 다 예약해 줬고, 하물며 직장에도 사표를 내면서 내 결혼식을 준비했다. 세상에 이런 동생이 또 있을까?
나는 늘 말하곤 한다. 이 세상에 최고의 여동생 콘테스트가 있다면 일등은 바로 내 동생 차지라고!
내가 헬로 키티를 좋아한다고 해드 쿠션, 핸들 커버, 옷 등등 1년 동안 헬로티키가 보일 때마다 모아서 미국에 보내주곤 하던 동생이다. 지금은 그 선물 세례가 첫 조카한테 이어지고 있다. 나는 참 복도 많다.
동생이 일사천리 결혼 준비를 다 해주어서 어리버리 멋모르는 우리 둘이는 한국에서 결혼식을 하고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가고 애틀랜타로 돌아왔다. 애틀랜타 아파트에 돌아왔는데 우리 집 문이 열려 있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