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개의 잡을 가진 학교에서 가장 바쁜 학생이 되어서 나는 캠퍼스를 종횡무진 달리고 있었는데 한국학생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 UGA에서 한국 학생을 피해 GSU로 전학을 오긴 했지만 여기서 일부러 한국 학생을 피하며 다닌 건 아니었다. 랭귀지 프로그램의 외국 친구들과 어울리기 바빴고, 일하느라 바빴다.
한국의 효성여대에서 어학연수를 온 영문과 동생 쑤와 멜로 머슈룸 피자집에서 점심을 함께 먹고 있는데 족히 190은 되어 보이는 거구의 한국 남학생이 우리 테이블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한국 학생 회장 Shane이었다. 예전에 한번 본 적이 있었는데 “누나!” 하며 엄청 반갑게 웃으며 다가왔다. 일행이 있다며 합석을 하자고 했고, 그 일행은 나랑 나이가 갔다고 했다. 예전에 소문으로 들었던 거제도 Shin이었다. 마침 내가 GSU로 전학 왔을 때 여름 방학중이라 그는 한국에 가 있어서 만날 수가 없었는데, 1년이 지나서야 만나게 된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한 과목 빼고 다 A를 받았는데 B를 하나 받았다고 머리를 삭발하고 도서관에 들어가서 산다고 했다. 그 소문을 듣고 난,
아휴. 재수 없어. 가까이 가면 안 되겠네.
였다.
쑤와 나는 자리를 옮겼고 그곳에 거제도 신이 있었다. 그런데..
'어라, 나랑 동갑이라고 하지 않았나?'
나보다 열 살은 많아 보이는 그가 나와 동갑이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한국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거제도 출신의 사람을 이곳 미국 조지아에서 만난 것도 신기하기만 했다.
나중에 신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내가 동갑이라는 이야기를 그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자신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내가 거짓말하는 줄 알고 주민등록증을 보여달라고 하고 싶었다고…
그는 부끄러움이 많은 듯 말수가 없었고 참 선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몇 주 후, 전에 다니던 UGA에서 알던 동갑 남학생이 우리 학교 MBA로 들어오게 되어 만났는데, 아는 형이 신을 만나서 도움을 받으라고 했다고 해서 신을 또 만나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그 남학생과 신, 그리고 신의 미국인 룸메이트 James도 함께 했는데 우리는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맥주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신은 태권도복을 입고 있는 James를 기숙사 복도에서 만나 알게 되었고 친하게 돼서 James의 친구 Chris와 셋이서 따로 집을 얻어서 룸메이트가 되었다고 했다. James는 스포츠 관련 전공이었는데 쾌활하고 재미난 친구였다. 우리보다 한살이 많다고 했다. 우리 넷은 헤어지기가 아쉬워서 2차로 James와 신이 살고 있는 트레일러 하우스로 향했고 다트 게임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음날 신과 제임스는 플로리다로 여행을 간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신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
대뜸 전화기를 넘어 흘러나오는 술이 취한 신의 한마디.
니가 왜 보고 싶냐? 니가 예쁘냐?
엥? 대뜸 전화를 걸어서는 보고 싶다고? 그런데 니가 너무 예뻐서 보고싶어가 아니라 니가 예쁘냐고 나한테 반문하는 이.남.자. 뭐지?
난 술이 많이 취했으니, 깨고 나서 얘기하라고 전화를 끊었지만 그의 목소리가 계속 귀에서 맴돌았다.
니가 왜 보고 싶냐? 니가 예쁘냐?
술이 취해서 술주정이나 하는 남자가 싫을 만도 한데, 이상하게 싫지가 않았다.
통역을 한다면, 왜 예쁘지도 않은 니가 보고 싶냐? 내가 이상한 거지? 그 비스무리쯤이었던 것 같다.
니가 너무 예뻐서 자꾸 생각난다고 해도 넘어갈까 말까인데, 니가 왜 보고싶냐고, 니가 예쁘냐고 반문하는 그가 어이 없고 싫어야 당연할 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며칠 동안 그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서 내 가슴속에서 또아리를 틀고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몇 주가 흘렀을까 학생회장 쉐인이 한국 학생들 파티가 있다며 나를 초대했고 나는 파티에 갔는데 그곳에서 거제도 신을 또 보게 됐다. 학생들이 빙그르르 에워싸고 춤을 추는데 거제도 신이 내게 던진 말!
어이 돼지띠! 나와서 같이 춰요
멜로 머슈룸에서의 쑥스러운 그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흥겹게 춤을 추며 나를 끌어당기는 거제도 신!
이렇게 흥이 많은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는 춤 삼매경에 빠져 있었는데 춤사위가 예사롭지 않았다. 브레이크댄스까지 추는 대단한 춤실력자였다!
그런데, 쉐인이 파티에 온 한국 학생들에게 거제도 신과 내가 사귀는 사이라고 공표를 하는 게 아닌가?
뭐라? 사귄다고? 이제 두 번 봤는데? 그렇게 신과 나는 여자친구, 남자친구로 발표가 되었고 우리는 정말 그렇게 사귀게 되었다. 아마 그가 그리 싫지 않았나 보다.
얼떨결에 떠밀려 그의 여자친구가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모든 것이 쉐인이 신을 위해 꾸민 일이었다.
한해 전, 여름 교환 학생 프로그램으로 한국에 있는 여대에서 우리 학교를 방문했다고 하는데 그 당시 GSU의 한국 남학생은 모두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었다고 한다. 다만 거제도 신을 제외하고.
한 번도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은 신이 쉐인에게 나를 좋아한다는 고백을 했고 쉐인은
'아니 우리 형이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하며 신나서 나랑 어떻게든 엮어주려고 파티를 열고 사귀지도 않은 우리를 남자친구, 여자친구로 공표를 해버린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정말 우리는 사귀게 되었고 3년 후 결혼을 했다. 쉐인은 자신이 우리를 결혼에 골인하게 한 지대한 은인이니 양복을 사 내라고 노래를 불렀고, 수년 후, 우리는 양복대신 쉐인의 아기 유모차며, 많은 선물들을 한국으로 보냈다.
나는 신의 첫 번째 여자친구다. 그는 한 번도 여자를 사귄 적이 없었고 첫 번째 사귄 여자친구와 결혼을 한 것이다. 언젠가 그에게서 받은 카드에 적힌
You’re My First Love
You’re My Last Love
You’re My only Love
라는 글귀가 나를 감동시키기도 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미국에 온 이유는 아마도 거제도 신을 만나기 위한 신(GOD)이 짜놓은 각본이 아니었나 싶다.
미국에 오길 참 잘했다.
<에필로그>
내 어떤 모습에 반했냐고, 언제부터 날 좋아했냐고 신에게 물었더니 UGA에서 온 남학생과, James와 맥주를 마신 날, 자기 집에서 다트 게임을 했을 때 다트를 던지는 내 뒷모습에 반했다고. 다트를 어정쩡하게 잘 못 던지는 내 모습이 귀여웠다나.
내가 넘어간 포인트를 떠올려보면 한밤에 전화 걸어 니가 왜 보고싶냐고, 니가 예쁘냐고 던진 그 한마디였다.
그냥 정말 궁금해 미칠것 같아서, 몇번 보지도 않은 내가 플로리다 바닷가에서 왜 자꾸 떠오르는지, 쭉쭉빵빵 잘빠진 미녀도 아닌데 왜 자꾸 눈앞에 어른거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서...
그냥 애타게 알고 싶어하는 전화기 너머 그의 진실된 목소리에 난 그날 밤 나도 모르게 반했는지도.
이 남자 뭐지? 하면서...
그리고...
UGA에서 온 남학생도 한국 학생 파티에 있었는데, 왠지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고 그 후로 몇 주 후 그는 학교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무 말도 없이 흔적 없이 사라진 그 남학생, 혹시 나를 좋아했나? 몇 년이 지나서야 나는 그런 생각을 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