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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라스 Jasmine Oct 04. 2024

IMF 때문에 MBA

2주 동안의 미국 일주를 마치고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고 이제 한국에 돌아갈 준비를 슬슬 하려고 했다. 그런데 알칸사주에 살고 있는 친구 현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갑자기 남편과 한국으로 짐을 싸서 돌아간다고 했다. 환율이 이천 원으로 올랐다며 더 이상 미국에서 학업을 이어갈 수 없다고 했다. 워낙 장난을 잘 치는 친구라 나는 당연히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미국에 왔을 당시 환율이 1달러에 800원이었는데 환율이 이천 원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친구의 말은 사실이었고 우리 학교의 한국 학생들도 하나둘씩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IMF라는 거대한 재앙이 한국과 여러 아시아 국가들을 덮쳤고 우리나라가 파산 위기에 접했다는 것이었다. 외화를 너무 많이 빌려서 나라가 갚을 능력이 되지 않아 IMF (국제 통화 기금)에 구제 금융을 요청한 사실상 파산 직전의 회사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한국에 전화를 해보니 회사들이 문을 닫고 특히 생산 업종이 아닌 광고회사는 50% 감원을 한다고도 했다. 서울에 있는 광고 대행사로 옮기기 위해 1년의 미국 어학연수를 선택한 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한국 학생들뿐 아니라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학생들도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있었다. 짐을 싸서 한국에 가야 할 나에게 한국에서의 미래는 앞이 캄캄한 백수였다. 전학오기 전에 다니던  UGA 학교에서 알던 한국 학생들이 다 나를 말렸다.


지금 한국에 가면 취직은커녕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여기 남아서 대학원을 가.


어떤 나이 많은 중국 학생이 나에게 대학원은 장학금을 받으며 충분히 다닐 수 있다고 했다. 

대학원이라니. 내 인생에 더 이상의 공부는 계획에도 없던 일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 가봤자 광고대행사에 취직할 챈스는 거의 0에 가까웠다. 

한국 학생들과 동양 학생들이 하나둘씩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고 있을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미국에 남기로 했다. 그때부터 대학원 입시를 위한 GRE 공부를 해야 했고 한국에 있는 친구가 기출문제지를 한국에서 소포로 보내주기도 했다. 


부모님께는 한국에 돌아갈 수 없게 됐다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한 학기의 학비만 대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 당시 여동생, 남동생이 모두 대학생이었는데 회사원이던 내가 갑자기 대학원생 학비를 염치없이 부탁드리게 되다니… 


IMF 시절 세 명이 대학에 다니고 있었으니, 부모님이 얼마나 힘드셨을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한참 나중에 여동생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어머니가 내 학비를 대기 위해 식당에 알바를 나가셨다고 한다. 먹자골목에 있는 개성식당 부엌에서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닭 털을 뽑으셨다고 한다. 주인이 홀에서 서빙을 하면 보수도 많고 고생도 덜한다고 홀서빙을 하라고 했지만 엄마는 혹시 아버지 친구들이라도 들릴까 싶어 아버지 체면 때문에 홀 서빙은 극구 마다하시고, 6개월 동안 부엌에서 닭털과 사투를 벌이셨다. 거의 채식만 하시는 엄마가 나 때문에 닭털을 뽑고 계셨다는 동생의 얘기에 나는 펑펑 울고 또 울었다. 다행히 나는 약속드린 대로 한 학기 후에는 장학금을 받고 조교로 취직이 되어 학비를 내지 않아도 돼서 엄마의 알바는 6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고 한다. 


마케팅으로 대학원을 가고 싶었지만 우리 학교에 마케팅 학과가 없어서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MBA를 선택했다. MBA에서 마케팅을 스페셜티로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GRE  시험은 한 번에 필요한 점수를 받았고 MBA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영어프로그램의 선생님 중 한 명은 나보다 두 살 어린 대학원생이었는데 한 번에 GRE 시험을 통과한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라며 눈이 똥그래져서 우리 반 학생들에게 내가 무슨 영웅인 마냥 칭찬을 해서 쑥스럽기도 했다. 


학부로 심리학을 전공했던 나에게 대학원에서의 수업, 회계학, 경제학, 운영관리는 너무나 생소하고 힘들었다. 한국어로 들어도 힘들었을 텐데 아직 마스터하지 못한 영어로 이런 생소한 수업들을 듣는 건 정말 고역이었다. MBA에서 내가 좋아하는 과목은 마케팅밖에 없었다.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난 학부과정에서 부전공으로 저널리즘을 선택했다. 낮에는 대학생으로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저녁엔 대학원생이 되어서 MBA를 공부하는 이중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N 잡러의 인생이 시작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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