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은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는 거다. 김춘수의 시 꽃에서 처럼, 어린 왕자라는 책에서 사막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했던 대화에서 처럼 말이다.
"너는 나에게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이 존재가 되는 거고, 나도 너에게 세상에 하나뿐인 유일한 존재가 되는 거야."
길냥이들과 내가 그러했던 것 같다. 세상에 수많은 고양이들이 있고 서로 비슷한 얼굴과 비슷한 색깔을 가진 고양이들이 수 없이 많지만 이름을 지어주고 불러준 고양이들은 그 고양이들 뿐이다. 노란 바탕에 진한 노란색 줄무늬를 하고 있는 흔한 색깔의 코리안숏 고양이지만 자세히 보면 얼굴이 동그란 녀석, 얼굴이 길쭉한 녀석, 코부분에 노란 얼룩점이 있는 녀석, 또는 입 주변에 노란 얼룩점이 있는 녀석, 귀가 쫑긋 솟은 녀석, 귀가 폴드처럼 접힌 녀석, 노란 줄무늬가 진한 녀석, 흰색보다 노란색으로 대부분 덮여있는 녀석, 진한 노랑으로 덮여 있는 녀석...... 등 자세히 보면 모두가 다 다르다. 그런 녀석들에게 나는 초창기에 하나하나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쁜이, 욕심이, 귀요미, 요미요미, 턱시도, 막내, 마미, 총명이, 강건이, 소시미, 용감이, 깜찍이, 깨돌이, 노랑이, 미미, 갈색 얼룩이, 노랑 얼룩이, 삼색이, 대장이..... 등등 수십여 마리에게 각각의 모습과 행동의 특징에 따라 이름을 지어 주고 불러주었다.
이 고양이들은 나의 발자국 소리를 알고 모여들었으며 나에게 다가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애정을 표현했고 그들의 언어로 나와 소통을 했으며 나는 나의 언어로 그들과 소통했다.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어 다가갈 수 있는 어떠한 관계가 된 것 같아 더 애정이 가고 좋았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이 아이들에게 이름을 불러 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름을 짓지 않기로 다짐을 했다.
요즘처럼 급작스럽게 날씨가 추워지면 그해 태어났던 길냥이들의 반은 보이지 않게 된다. 며칠뒤 누군가로부터 죽어서 땅에 묻어 줬다는 소식을 듣게 되거나 혹은 어느 한쪽에서 뻗뻗하게 죽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몇 년 전에는 범백이라는 고양이 전염병이 돌고 나서는 성묘가 된 냥이도 어린 냥이들도 반 이상이 죽었었다.
많은 길냥이들은 세상에 태어나 일 년도 채 살아보지 못하고 어느 추운 겨울에, 혹은 무더운 여름에 질병과 사고로 쓰러져 지구라는 별을 영원히 떠나갔다. 어떤 아이들은 이름을 짓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어제까지 해맑게 웃어주고 장난치던 아이들은 눈을 감지 못한 채 뻣뻣하게 죽어간 모습을 내 눈으로 목격하고 나서는 더 이상 새로 태어나는 어린 고양이들에게 이름을 지어 줄 수 없었다. 더 이상 부를 수 없는 냥이들의 이름이 슬픔으로 남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그냥 길냥이들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고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이 아이들에게 이름조차도 없이 떠나간다는 것은 어쩌면 더 큰 슬픔 같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처럼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처럼 의미가 없었으나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길냥이들도 나에게 꽃처럼 의미 있는 각각의 존재가 되었던 것을...
모든 생명은 태어나고 죽는다.
어찌 보면 죽기 때문에 우리의 살아있는 동안의 생명이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존재들은 나름의 소중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유독 길에서 산다는 이유로 치부되는 길고양이들의 삶이 안타까운 이유는 뭔지 모르겠다........
다만 바라기는 길냥이들의 삶도 꽃처럼 아름답게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길냥이들뿐만 아니라 나의 삶도, 어느 누군가의 평범한 이들의 삶도, 꽃처럼 의미 있는 존재로 기억될 수 있으면 좋겠다.
요즘처럼 급격하게 추워지는 겨울이 오면 길냥이들에게 추위를 피할 한 줌의 보금자리가 있기를...
마음씨 좋은 이웃들로 인해 헐벗지 않기를 소망해 본다.
김춘수 님의 시에서 처럼 우리 모두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