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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드레 Jul 24. 2024

비가 와도 젖은 자는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나를 젖게 해 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 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 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 올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사랑, 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 오규원

 




연일 비가 내린다.

비 오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요즘 너무 오래 장마가 지속되다 보니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다.


비가 내리면 생각나는 시가 있다.

오규원 시인의 저 시다.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과 잠시 비를 피해 처마 밑에 머물렀던 추억을 가지고 있다.

사랑이 끝나고 나서도 그 기억이 애틋해서 한 번 더 머물렀다고 했다.

그렇게 비가 내리던 날의 자연은 화자에게 잊지 못할 가슴 아픈 추억을 만들어 주고 나서,

무심하게도 아무렇지 않은 듯 흘러 흘러간다.

인간의 삶은 유한해서 그 안에서 태어나고 사랑하고 죽고 하면서 짧은 시간을 흐를 뿐이지만,

자연은 혼자 유유히 모든 것을 수용하면서 무한하게 흘러간다.

앞으로도 비는 이렇게 내리고 또 내릴 테지만,

우리가 맞게 되는 비는 우리 인생의 극히 짧은 시간을 함께 할 뿐이다.

사랑의 시간을 적셨던 비는 화자를 남겨놓고 홀로 자신의 시간을 반복해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 비로 인해 온몸이 적셔졌던 나약하고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이미 젖어 버렸기에 다시 젖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사랑에 한 번 깊게 젖었던 사람은 다시는 사랑에 깊게 젖어들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자연은 인간이 어떤 삶을 살아가든 계속 자신의 시간을 살아낼 것이다.

그 시간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시간들이다.

나에게 허락된 인간의 시간은 그 시간들에 비하면 얼마나 사소할 것인가.

그 사소함조차 내겐 상당한 무게로 다가와서 가끔은 휘청거릴 때도 있다.

자연이 길고 긴 시간을 살아내는 방식은 간단하다.

그냥 주어진 대로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다.


어차피 언젠가엔 그칠 비이고 강물과 함께 흘러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릴 것이다.

그저 있는 그대로,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온몸으로 맞이하면 된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자연이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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