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의 썸머>(2009)
'나'는 타인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뻔한 격언이 있다. 당연히 그렇겠지. 누가 면접에서 자기소개를 하는데 '저는 눈이 두 개 달렸고 코는 하나, 입도 하나가 달렸습니다' 하진 않을 것 아닌가. 그건 다른 사람을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인간인 척 위장한 외계인일 것이다. 내가 타인과 구분되는 점이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서는 그만큼 타인에 대해서도 깊게 알아야만 한다.
하지만 그 말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가령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건 왜일까? 또 어떻게, 얼마나? 그 또한 타인을 경유해서만 알 수 있다. 가령 주변 사람에게 관심을 충분히 기울이지 않아 관계에서 문제를 겪거나, 혹은 반대로 놓아야 할 인연에 지나치게 마음쓰며 중심을 잃는 식으로 말이다. 내 타고난 기질이 어떠한지, 앞으로 무엇을 기준으로 삼고 행동할지는 시행착오를 통해서만 알 수 있고, 그 시행착오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겪을 수 있다.
<500일의 썸머>의 상징적인 엘리베이터 씬(혹은 더 스미스 씬)을 떠올려보자. 톰은 썸머에게서 '비주류이고 찌질한 스미스를 알아보는 안목을 가진, 흔한 여자들과는 다른 이상 속의 그녀'를 본다. 반면 썸머는 톰에게서 새로운 세계를 가진 한 명의 온전한 사람을 보았다. 톰은 썸머가 자신을 이상향 속으로 데려가주기를 바라며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하지만, 썸머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생긴 상처에도 불구하고 톰을 믿어보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관계의 양상은 영화 내내 이어진다. 링고 스타를 좋아하는 썸머의 취향을 비웃는 톰과 달리, 썸머는 톰이 진정으로 흥미를 가지고 있던 건축에 관심을 가지고 그 열정을 다시 일깨워주기 위해 노력한다. 알랭 바디우는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는 타자를 발견하기 위해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자신의 기준에 썸머를 편입시키려고 하는 톰과 달리, 썸머는 자신이 사랑하는 톰이라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전혀 알지 못했던 건축이라는 분야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기존의 세계를 파괴하는 용기를 보인다.
영화가 톰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만큼, 이 일련의 사건들이 톰에게는 어떤 의미로 남았을지 생각해보자. 톰과 썸머는 운명이었을까? 안타깝게도 아니었다. 그럼 그 둘은 운명이 아니었을까? 그 또한 아니다. 톰에게는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다. 썸머의 취향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털어놓은 비밀에 관심을 가지고, 아니면 최소한 영화를 보면서 우는 썸머에게 왜 그러느냐고만 물어봤더라면 일은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썸머 또한 한 명의 인간일 뿐이고 그 오랜 시간동안 속마음을 제대로 털어놓지 못한 데는 책임이 있겠지만, 톰이 썸머의 간접적인 시그널을 하나라도 제대로 탐지했더라면 최소한 어딘가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찌질하고 자아도취적인 톰은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고 평생 후회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 새로 만난 여성의 이름이 어텀이라는 사실이 등장할 때쯤이면, 썸머라는 인물 자체는 사실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썸머는 한 명의 사람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사건, 혹은 상징이 된다. 우리는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비춰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상을 기준삼아 스스로의 모습을 가꾸기도 한다. 썸머는 실제 인물이었을 수도 있지만, 여러 명이었을 수도 있고, 한 편의 영화나 한 권의 책, 혹은 우연한 깨달음이 될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톰은 거울에 비친 상을 보며 엉망이었던 자신의 모습을 다듬는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인생은 눈먼 손을 휘저으며 나아가야 하는 짙은 안개길일 뿐일까?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먼저 걸어 본 자들이 남긴 조언들이 있으니, 앞이 보이지 않더라도 최소한 세수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새로운 거울을 통해 내 추악한(혹은 잘생긴) 모습을 마주해야 할 경우가 생길지도 모르니, 지금까지 발견한 것들 중 가장 세련된 매뉴얼을 참고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상대의 성장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
상대의 심리적 욕구를 보살피는 책임,
상대의 개성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존경,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한 지식"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