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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 Feb 03. 2023

프로파간다는 가치판단보다 빠르게 침투한다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2019)


한 한국인 유튜버가 영국에 놀러가서 프리미어 리그 경기를 직관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상대팀을 응원하던 소년이 다가와 시비스러운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인종차별적인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촬영자가 뭐라 대꾸를 할 틈도 없이 친구로 보이는 일행이 외쳤다. "Fuck Racism!"



이 짧은 해프닝이 인상깊었던 이유는, FIFA의 반-인종차별주의 캠페인이 의외로 굉장히 효과적임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저 유튜버가 당한 일은 따지자면 초등학생들이 '앙 기모띠'거리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들은 정말로 그 주장에 동의한다기보다는, 그냥 유행하는 말을 재미삼아 내뱉을 뿐이다.



그런데 경기장에 'Say no to racism'같은 표어 몇 개 걸어놓는 것으로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성공한 셈이다. 무려 초딩들한테까지. 그들이 인종차별적인 사유를 가지는 데 깊은 가치판단이 선행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인종차별은 쿨하지 않다는 식의 프로파간다적 메시지만 반복해서 보여줘도 그것을 막는 기능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는 한국어 제목이고, 원제는 '섹스 에듀케이션'이다. 정말이지 제목만 봐도 넷플릭스-신세대적이고 쿨하고 과감하고 성교육계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것만 같고 여러모로 에듀케이트받고 싶어지는 제목이 아닌가? 첫번째 에피소드를 재생하면, 대략 10초만에 아름답고 몸 좋은 남녀가 정사를 나누는 장면이 (PG-18으로) 나온다. 기존 운동상태를 유지하려 하는 흉부 지방층 한 쌍이 눈에 들어올 때쯤이면 대략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 장면을 보고도 중간에 시청을 멈출 사람은 없지 않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기념비적인 첫 장면은 마치 분쇄-땅콩 마니아에게 월드콘 첫 입과 같은 것이었고, 그 이후로는 점차 남자의 알몸, 남자의 (모조)성기, 남자끼리의 게이 관계만 잔뜩 나오고 여성의 신체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게이 키스보다 더 많이 나오는 것은 젠더퀴어의 있는 그대로의 수용을 요구하는, 그리고 그것을 반대하는 행위를 폭력으로 묘사하는 서사들이다. 실제로 드라마에는 이성애보다 그 외의 관계가 더 많이 나오는데, 여기서 '그 외의 관계'란 단순한 동성애 외에도 논-바이너리나 심지어 외계인-성애도 포함한다.



많은 사람이 거부감을 느껴 중도하차했고, 어떤 사람은 드라마의 다른 매력을 위해 거북함을 감수했으며, 다른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지 인지하기도 전에 8개의 에피소드를 모두 보았다. 중요한 것은 이 논-바이너리 인간과 자신을 이성애자로 추측하던 남성 간의 관계, 혹은 뒤늦게 자신의 동성애적 정체성을 깨달은 여성과 외계인-성애자 여성 간의 관계 등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프로그램은 예리하게 벼려진 프로파간다를 시청자의 머리에 심어놓는다는 사실이다. 그저 누워서 시선을 끌어당기는 드라마를 한 편 봤을 뿐인데.



이제 재생은 끝났으니, 뒤늦게나마 나 자신을 돌아본다,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솔직하게 말해, 생리적인 거부감이 조금 든다. 이게 대체 뭐였나 싶으며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별로 보고싶지 않았던 것을, 혹은 너무 많은 것을 봐버린 기분이다.



그렇다면 젠더퀴어에 대한 감수성은 길러졌는가? 앞으로 이와 유사한 이슈를 접하게 되면, 이전과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될?



마 조금은 그러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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