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점선면 Aug 19. 2024

낡은 흑백사진, 채색 두 방울

이李씨(이하 이): 어릴 적 아버지는 긴 직사각형 유리판 액자에 가족사진들을 펼쳐 모아 걸어두곤 하셨어. 벽장위쪽 공간에 그런 액자 두 개를 나란히 두었기 때문에, 그 안에 담긴 사진들이 백여 장은 족히 될만했지.


일본에서 태어나 우리말을 모르는 동년배 사촌들의 사진,  일본에 사는 아버지 형제친척들이 모여 찍은 사진들, 친척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를 뵈러 우리 시골집에 왔을 때 모여 찍은 가족사진들.


우리 부모님은 카메라가 없었지만, 일본 사는 아버지의 형제들은 카메라를 들고 다녔고, 사진을 인화하면 우편으로 보냈는지, 인편으로 가지고 왔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어쨌거나 아버지에게 주셨기에 그렇게 가족사진이 액자에 걸려 전시될 수 있었겠지. 1980년대쯤이 되겠구나. 그래도 전부 칼라사진들이었어.


해를 지나면, 사진들은 옛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교체되었고,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촌들의 성장을 사진으로 보았지.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였나? 가장 우리 형제와 나이가 비슷한 사촌 형제 세 명이 처음 우리 집을 방문했어. 그때는 영어를 모를 때였는데, 신기한 건 언어의 장벽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즐겁게 놀았다는 거야. 그때 찍은 사진들에는 몽글몽글한 어린아이들의 웃음이 피어나고 있어.


점선면(이하 점): 이 씨가 오늘 말하는 책은 그 보다 더 오래된 이야기인가, 흑백사진이라고 하는 걸 보니?


: 이 책을 읽으면서 딱 느껴지는 게 그거였어. 앨범에 꽂힌 흑백사진들.

1960년대 후반, 70년대초의 이야기인데.

그런데, 흑백이라고만 하기에는 뭔가 아쉬워.

딱 두 방울만큼씩 색이 들어간 사진 같은 기분이랄까?


책은 30여 개의 아주 짧은(단편이라고 하기에도 짧은, 작은 나뭇잎파리 같은 그래서 엽편이라고 해야 적당할) 이야기로 되어 있어. 흥미롭게도 책 서두에 있는 작가의 말이 제일 길었어.

작가의 말이 책 앞에 있는 건, 그 걸 읽어야 그 뒤의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고,

이 책이 1984년 초판 발행되고 나서 긴 세월 동안 재판을 거듭하며 살아남게 되었기에, 그 후의 후일담까지 담고 있어서였어.


작가는 의도적으로 독자가 내키는 대로 어느 페이지를 펼쳐서 읽든 바로 읽힐 수 있는 짧은 글들을 썼고, 한 권으로 모은 거라고 밝히고 있더라고.


그래서 그런가, 이야기에 따라 느낌이 조금씩 달라.

어쩔 때는 포근한 햇살 노랑, 어쩔 때는 걱정의 서늘하고 어두운 파랑과 보라, 어쩔 때는 열정의 붉은빛, 어쩔 때는 싱그러운 초록, 어쩔 때는 쇠퇴하고 낡아가는 갈색과 회색.

그렇게 흑백사진 어느 한 부분에 그 느낌을 담은 옅은 채색의 기운이 느껴진달까.


이 책은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가난한 이주민 가정의 딸, 작가의 분신인 에스페란자가 이주민들이 모여사는 망고스트리트에서 살면서 보고, 듣고 겪은 이야기들이야. 실제 작가가 경험한 이야기들이자, 누군가로부터 채집한 이야기들이기도 하고.


이야기에는 가난이 진하게 배어있어. 허물어져가는 집, 낡은 계단, 나무판으로 못질해서 가린 창문, 얻어 신은 신발. 이 시대에 소녀들이 겪는 차별, 여성들에게 좀처럼 오지 않는 교육의 기회. 변두리로 몰려 살며 어떻게든 삶을 꾸려보려는 인간상들. 멕시코를 떠나왔지만, 영어를 할 수 없어 3층에 스스로를 가둔 할머니.


그래도, 어리고 순수한 에스페란자, 그녀의 동생과 또래 친구들의 반짝이는 웃음이 솟아 나와. 그리고, 그녀의 이름대로  hope, 희망. 언젠가는 망고스티리트를 벗어나 자신만의 집을, 멋들어진 집을 가질 거라는 희망을 향해 가고 있어. 하지만, 그곳을 영원히 떠날 수 없다는 걸, 마지막 장에서 말하지. 돌아올 거라고. 잊히지 않을 거라고.


작가가 왜 작가의 말을 그렇게 길게 썼는지 알겠더라고. 결국은 그 꿈을 이뤄냈거든. 작가의 말에서 자기만의 집을 갖게 되고, 엄마를 초대하고 둘이 옥상에 누워 석양을 바라보지. 해가 저물고 달이 떠오르도록 함께 누워 온전한 소유권을 감상하는 시간을 들려주거든.


어린 날의 망고스트리트는 그녀가 벗어나고 싶던 곳이었지만, 세상은 그녀가 들려준 망고스트리트의 이야기를 사랑했어. 빛바랜 추억의 장면들이지만, 생생함을 소환하는 두 방울 색채 덕분이지 않을까.


오늘 책은 'The House on Mango Street'입니다. 우리말 번역서는 '망고스트리트'라는 제목이에요.

짧은 제목의 이야기 한편이 한 장의 사진처럼 느껴집니다. 오는 날 모든 것이 풍족한 세대에게는 너무 먼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져서일까요, 우리말 번역서는 절판되었네요.

영어 원서로 읽기에는 문장자체가 쉽고 간결하고, 분량도 적어서 저는 오전 반나절만에 다 읽었어요.

간결한 문장들이지만, 서정적인 감상이 행간에 있어요.

기승전결의 소설적완성을 기대하시면 안되는 책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