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책마당 강연] 내 마음에 비친 뮤지컬(2)
내 마음에 비친 뮤지컬 (1)에서 계속
저는 뮤지컬 넘버를 '인물의 심장 박동'이라고 말씀드리는데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지금 이 순간'이라는 넘버를 예시로 들어볼게요.
이 넘버는 헨리 지킬 박사가 인간 내면의 선과 악을 분리하는 실험이 병원 이사회에서 거절당하자, 자신이 실험 대상이 되기로 결심하면서 부르는 넘버입니다.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이는 순간을 지나 지킬 박사의 고뇌가 확신으로 변화하는 순간 '빰-' 하는 전주가 흘러나옵니다. 그 순간부터 관객들은 선율을 타고 지킬 박사의 내면으로 입장합니다. 그리고 음악의 상승, 감정의 고조와 함께 지킬 박사의 심장 박동을 관객들도 고스란히 느끼게 되지요.
이처럼 인물의 심장 박동이 음악이 되고, 음악을 타고 흐르는 배우의 심장 박동은 나의 심장 박동과 동기화되기 시작합니다. 한 번 작품에 몰입하기 시작하면 나를 드러내는 것보다 감추는 것에 익숙한 일상을 벗어나 깊은 곳 소용돌이치는 진짜 감정과, 그것을 넘어서는 본능적인 두근거림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놓여있는 객석은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으로 변화합니다.
이처럼 뮤지컬은 음악을 통해 관객들의 '본능적인 두근거림'을 일깨웁니다. 어떤 면에서 굉장히 친절하고, 직관적이며, 본능적인 장르라고 할 수 있지요. 공연을 보고 나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작품은 음악이 덧입혀진 장면으로 오랫동안 마음 한편에 저장되곤 합니다.
오늘 강연 역시 '뮤지컬에 대한 좋음'을 나누는 강연인 만큼 여러분들께 '하나의 음악'처럼 기억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거듭했는데요. 앞서 강연 시작과 함께 불렀던 뮤지컬 <레드북>의 '사랑은 마치'라는 넘버를 통해 오늘 강연을 풀어나가고자 합니다.
'사랑은 마치'의 가사는 우리가 뮤지컬을 사랑하는 모습과 굉장히 닮아있다고 느껴졌습니다. 1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우리가 뮤지컬을 사랑하는 이유를 비춰보고, 자발적인 사랑으로 기꺼이 1시간(혹은 그 이상)을 내어주신 여러분들과 '좋음을 공명하는 순간'을 만들어 나가보고자 합니다. 이 강연이 딱딱한 수치나 통계, 분석으로 가득한 시간이 아니라 하나의 음악과 장면으로 남길 바라며 '사랑은 마치'의 가사를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흐린 날이 있으면 맑은 날도 있는 것처럼, 뮤지컬을 관람하는 일련의 과정은 날씨의 변화와 비슷한데요. 우리 인생 전체를 10이라고 했을 때 대게 좋은 일이 9, 나쁜 일이 1의 비율로 일어난다고 해요. 하지만 실패와 좌절에 취약하게 설계된 우리는 9로 행복하기보다 10번 중 고작 한 번 찾아오는 '1'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죠.
공연 예매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5점짜리 리뷰는 지나치지만 1점짜리 리뷰는 꼭 클릭을 해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며 생각하죠. '돈 아까우면 어떡하지?', '재미없으면 어떡하지?'. 당연한 고민입니다. 1-2천 원 하는 문화생활이 아니기 때문에 지불한 돈만큼 시간과 노력을 보상받고 싶어 하는 것은 본능적인 심리잖아요. 하지만 '별점'과 '리뷰'역시 공연을 관람한 수많은 의견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공연은 개인의 서사와 맞아떨어질 때 폭발적인 힘을 가집니다. 하나의 공연이 모두에게 인생 작품이 될 수는 없지만, 그 어떤 공연도 누군가에게 인생작이 될 수 있지요.
때때로 찾아오는 실패 역시 당연한 이치입니다. 지루한 순간, 극장 밖을 뛰쳐나가고 싶은 순간은 언젠가는 찾아옵니다. 선택지는 두 가지. 정말로 극장을 뛰쳐나가거나, 이질감과 불편함을 느끼는 내 모습을 관찰해 보는 것. 태초에 인간이 그렇게 설계된 것처럼, 개인의 취향은 실패했을 때 더욱 견고해지고 날카로워지죠. 데이터를 쌓아가세요. 그리고 좋음에 공명하는 순간, 고개를 숙이게 하는 불편한 순간의 감각에 모든 것을 집중해 보세요.
변화무쌍한 하늘은 곧 자연이고 우주입니다.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혼돈이며 인간은 그 속에서 질서를 발견하며 역사를 써내려 왔습니다. 뮤지컬 한 편이 무대 위로 올라오는 과정도 이와 비슷합니다. 뮤지컬 창작자들은 과거와 현재, 상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존재하는 무한의 혼돈 속에서 소재를 포착합니다. 그리고 공연이라는 큰 틀 속에 '질서 있게' 풀어내기 시작합니다.
질서 정연한 약속의 조합들로 이루어진 한 편의 공연은 관객의 마음속에서 또다시 혼돈으로 탈바꿈합니다. 정제되어 있던 마음이 잘 짜인 질서를 통해 흐트러지는 셈이지요. 이야기는 관객 개개인의 서사를 만나 저마다 다른 소용돌이를 휘몰아치게 합니다. 그러나 이 혼돈은 당연하게 생각해 온 것들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익숙함으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지게 만들며, 자신이 느껴온 것이 신념이 아닌 편견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다른 모양의 혼돈입니다. 이로써 관객은 들여다보고, 발견하게 되며, 회복하고 성장합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각자의 혼돈 속에서 새로운 삶의 질서를 세워나가는 것이죠.
매일같이 똑같은 대본과 음악으로 똑같은 장소에서 공연의 막이 오르지만 하늘아래 똑같은 공연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모든 예술의 전리품은 바라보는 자(관객)의 입장에서 기억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공연을 본 관객의 수만큼 매일 세상에 단 하나뿐인 공연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몇 달 전 뮤지컬 <베토벤>을 관람하고 인스타그램에서 라이브 방송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우연히 작품 속 한 장면인 '매달린 피아노 연출'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요. 저는 군중 속에 홀로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그랜드 피아노가 '사회와 귀족의 후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예술가 베토벤의 불안정한 상태'를 나타낸다고 말했고, 교수님(구독자)들은 '가십거리로 소비되는 베토벤', '베토벤의 영감이 봉인된 상태', '군중 속의 고독' 등 다양한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하나의 작품, 장면, 음악, 배우의 연기 하나하나가 이토록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장르가 뮤지컬입니다. 마치 보물 찾기를 하듯 작품 속 숨겨진 상징과 기호를 파악해 보는 것도 관극의 또 다른 즐거움이 됩니다.
어쩌다 보니 6년이라는 시간 동안 '황조교'를 통해 작품과 관객 사이에서 뮤지컬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해왔는데요. 제게 환상으로 가득 채워진 무대를 바라보며 일상의 위로를 받는 많은 분들과 오랫동안 뮤지컬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대라는 공간을 환상으로 남겨두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대 바깥에서 일어난 일들로 인해 한 번 깨진 환상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제가 던지는 개인적인 의견이 누군가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가로막을 수도 있지요. '길은 터주되, 적어도 가로막지 말자.'가 저의 1원칙입니다. 많은 분들이 한 번이라도 더 좋은 작품을 만나길 바라는 것, 그리고 하나의 작품 속에서 셀 수 없는 '구름의 모양'과 '하늘의 빛깔'을 발견하는 것.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바라본 하늘의 빛깔을 품고 일상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것이지요.
내 마음에 비친 뮤지컬 (3)에서 계속됩니다.
뮤지컬 천재 황조교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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