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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되는 서귀포 극장, 시대정신이 사라지고 있다

by 노고록

서귀포 최초 영화관인 서귀포극장(구 관광극장)이 폐쇄도 아닌 완전 철거를 한다.. 안전진단 결과 E등급을 받았으니 할 수 없이 철거를 해야 한다고 한다. 외국에서는 건물이 수백 년을 견딘다는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100년을 견디지 못하고 이렇게 강제 철거를 해야 하는 건물이 많은지? 현재 지붕이 없고 건물의 외벽만 있는 노천극장인데 구조상 붕괴의 문제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인 상황을 모르는 나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는 않는다. 서귀포극장은 이중섭거리 가운데 있고, 좁은 공간으로 최근 확장 문제가 불거진 이중섭전시관과 같은 공간을 사용하고 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어내는 그런 모습으로 비치어질 수도 있다.



어릴 적 관광극장은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곳이었다.

극장은 서귀포에서 가장 가파른 막동산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다. 깔딱 동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국민학교 1학년 시절, 뒷뱅듸인 집에서 학교까지 가려면 반드시 이 극장 앞을 통과해야 했다. 내가 다닐 학교가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잠깐 다른 학교에서 더부살이를 하던 시절이다.


등하굣길 하리를 숙이고 동산을 걸어서 올라오면 앞에 나를 따라 움직이는 장애물이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면 험상궂게 생긴 동네 애들이다. 당시 애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나, 극장과 같은 특별한 시설이 있는 지역에는 자기네 길이라고 "이 길로 다니지 마"하고 무작정 막는 텃새라는 게 있었다. 등굣길은 아침 이른 시간이라 길을 막은 애들은 없지만 하굣길에는 어김없이 이런 애들이 어슬렁대며 길을 점령하고 있었다. 까닭도 없이 이리저리 가는 길을 가로막으면서 통행을 막는다. 이럴 때 지나가는 어른을 만나면 옆에 붙어서 슬쩍 지나는 게 상책이었다. 그 시간이 주로 극장의 영화 상영 시간과 겹친다. 그러기에 당시 관광극장은 어린 나에게 구세주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런 슬픈 추억으로 시작된 관광극장은 학교를 옮긴 후에는 가보고 싶었던 곳으로 변했다. 당시 영화를 본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관람료도 비쌌지만 영화는 어른들이 보다는 사회적 통념이 강하던 시절이다. 영화를 보면 금방 문제아가 된다. 고학년이 되면서 몇 달에 한번 정도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를 보러 가는 날이 있었다. 주로 당시 국민계몽을 위해서 제작한 홍보영화, 건전영화, 계몽성 영화로 "학생관람가"라고 극장 입구에 큼지막한 문구가 붙는다.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를 보러 가는 날이다. 그런 날은 학교에서 수업이 한두 시간 단축되기도 한다. 학교올 때 극장표값을 가지고 오라고 미리 알려준다. 학교에서 극장까지 줄을 맞추어서 단체로 간다. 아주 특별한 행사다.


당시 사회에서 극장의 역할이 얼마나 크고 비중이 있었는지, 하루의 끝은 영화 마지막 상영이 끝나는 시간이었다. 대부분의 음식점들과 상가도 이 시간을 기준으로 해서 영업시간이 설정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게 시내버스 막차시간이다. 아침 5~6시부터 운영하던 시내버스는 21시 정도 되면 중간 막차를 보내고 1~2시간 정도 시내버스가 끊긴다. 일상의 하루는 종료다. 이제 극장 마지막 상영이 끝나는 11시경에 되면 진짜 막차가 있다. 자가용이 없던 시대, 버스를 운영해도 수지타산이 맞은 정도로 손님이 많았다는 증거다.

서귀포 극장의 역할은 다양했다. 오후 늦은 시간에야 영화 상영을 시작했기에 오전에는 극장이 빈 시간이다. 학교의 발표회나 학예회 장소는 늘 극장이다. 졸업식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에는 시내에 무대가 있고, 객석이 규모 있게 있는 공간이 없었기에 극장은 일종의 행사와 공연의 공간이기도 했다. 아마 그 시절 서귀포극장은 시내 최대, 그리고 유일한 문화공간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65년 동안 서귀포 극장은 부침이 심했다.

1960년에 건물을 짓고, 1963년 서귀포에서 최초로 관광극장이라는 이름으로 개관을 했다. 그 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서귀포극장, 서귀포 관광극장이라는 이름으로 바꾸면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쳤다. 1993년 화재로 지붕이 소실되고, 결국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1999년 문을 닫았다. 폐업 후 서귀포의 쇠퇴와 맞물려 별다른 활용방안을 찾지 못했다. 이중섭거리 중심부에 있는 건물로 방치는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었기에 2013년 서귀포시에서 건물을 임대했다. 아트플랫폼사업으로 공공미술작품을 설치하고, 의자를 모두 떼어내 계단식으로 정비했다. 2015년에는 노천극장으로 재개관해 다양한 공연 예술을 할 수 있는 야외공연장으로, 작가의 산책길 프로그램 운영 및 전시실 등 문화공간으로도 활용됐다. 2023년 12월에는 서귀포시가 해당 건물 및 부지를 완전히 매입했다. 그리고 올해 5월부터 8월까지 정밀안전진단 용역이 시행됐다. 이 결과 E등급 판정으로 건물 붕괴 등 안전사고 발생 우려 등으로 불가피하게 철거가 결정됐다.

이제 9월에는 노천극장 울타리 부분은 철거되고, 나머지 건물 부분은 내년에 철거를 한다고 한다. 매표소와 영상실이 있던 부분이다. 향후 운영방안은 주민들과 논의를 해서 결정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서귀포극장 외관(2024.11.13 촬영)
극장내부 계단식 노천극장으로 외벽만 있다(2024.11.13촬영)

우리는 고향을 찾는다. 추억을 만나기 위해서다. 힘든 타향생활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기 위함이다. 그러나 너무나 변해버린 고향의 모습은 낯설다. 찾고 적응하는데 다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니 결국에는 다시 찾을 수 없다. 고향을 그리는 향수도 없어진다. 내 추억을 찾을 수 없는 곳은 이미 고향이 아니다. 내 마음도 같이 떠난다.


90년대 내가 서귀포를 떠나오기 전까지 생활의 주요 거점은 동명백화점, 상설시장, 목화백화점, 삼일빌딩, 초원다방, 남군 농협, 서귀포극장, 삼일극장 등 이런 건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만남과 약속의 기점이었고, 문화와 생활을 하던 장소였기에 우리 시대 생각과 정신이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한때 서귀포의 부흥을 이끌고, 문화와 생활의 중심이었던 이런 건물들은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서귀포 행사의 중심지였던 서귀포읍민회관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서귀포 시민문화체육복합센터가 새로 개관했다. 물론 같은 비슷한 기능을 한다지만 그 건물 그 모습이었기에 만들어지고, 형성되었던 생각과 문화를 재생할 수는 없다. 사람들의 애환이 묻어있는 매일시장 안 상설시장과 목화백화점도 철거된 체 안을 볼 수 없게 펜스로 둘러져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시장 공간이 아닌 다른 공간으로 계획하다가 주변의 반대에 부딪친 것으로 알고 있다. 비어있는 공간만치 시민들의 마을도 공허하다. 서귀포 중심부에 자리 잡았던 삼일빌딩은 그 자리에 아주 다른 모습의 건물이 들어섰다. 같은 위치 다른 모습, 예전과 같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건물이었으면 좋겠다. 이제 서귀포 시내에서 남은 것은 동명백화점과 강의원 건물이다. 동명백화점은 몇 번 철거 위기에 놓였다가 반대에 부딪치자 뚜렷한 방법을 찾지 못한 상태다.



건축에서는 장소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건물이라는 공간과 물리적 환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경험과, 체험, 생각과 행동의 집합체이다. 이러한 것들이 응축이 되고 오랜 기간 쌓이다 보면 지역성과 역사성을 가지게 되고, 그 지역의 실체적 특징과 시대정신과 문화가 되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서귀포극장이 갖는 장소성은 서귀포의 역사와 시대정신을 얘기하는데 중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이 없다.


개발의 시대다.

단순히 철거하고 짓은 물리적인 건설과 개발만이 아니라 그 안에 곁들여져 있는 문화와 정신의 계승과 보전에도 같이 고민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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