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엄마 이야기
무더위가 시작될 때쯤, 엄마는 내게 작품을 부탁하셨다.
그동안 엄마는 내게 종종 작품을 부탁하셨었다.
가끔씩은 나도 내 정체성을 잃고 혼란스러울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어떻게 아시는지
기막힌 타이밍에 내게 작품을 맡겨주시곤 하셨다.
엄마는 글 쓰는 걸 좋아하셔서 언제나 엄마의 방에는 책과, 노트, 필기도구들이 가득했다.
내가 어릴 적부터 보아온 모습니다. 두꺼운 노트에 엄마의 글, 때로는 순간의 감정들이 들어있을 것이다.
내게 맡기신 이번 글은 1988년도 글이다. 나도 기억이 흐릿한 1988년.
물론 88 올림픽이라는 강력한 이슈가 있긴 했지만, 내겐 그다지 기억이 선명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나보다 훨씬 더 기억이 가물가물할 나이이신 엄마는이 기록 덕분에 그날의 감정을 기억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 글은 엄마의 엄마, 나의 외할머니 이야기다.
외할머니는 내가 어릴 적 돌아가셨기 때문에 할머니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꽤나 무뚝뚝한 분이셨던 걸로 기억한다. 보통 할머니들은 손자들을 보면 무조건 이뻐하신다는데
외할머니는 오히려 무섭기도 했던 것 같다.
엄마는 가끔씩 할머니를 떠올리면서 그땐 철이 없어서 엄마맘을 몰랐다며 눈물짓곤 하셨다.
산소가 멀리 있어서 자주 가지 못하고 늘 그리워만 하신 엄마는.. 엄마의 엄마를 평생 그리워하며 살고 계신다.
엄마의 글을 한 자 한 자 써내려 가다 보니 무덤가에서 울고 계신 모습도, 너무도 그리워하는 마음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나도 엄마가 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이제 연세가 많고 약해지셔서 힘없는 엄마가 되셨지만, 내게 엄마가 없는 것은.. 상상이 어렵다.
기억이란 세월을 타고 점점 작아져서 그때의 모든 것을 다 기억하지 못하게 한다.
좋은 기억도 그만큼의 좋은 감정 그대로를 기억하지 못하고, 안 좋은 기억도 그만큼 다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안타깝지만,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다.
다만, 모두를 잊고 싶지 않아서 기록을 남긴다. 그것만이 유일한 기억이고, 추억이고, 삶이다.
어쩌면 엄마의 낡은 노트에 잠들어 있을지 모르는 엄마의 글을 작품으로 완성시킬 수 있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앞으로도 엄마의 글을 오래오래 작품으로 남겨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