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장줄리앙의 종이세상>
단순한 그림체가 주는 편안한 매력, 그리고 그 안에 담긴 통찰력으로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장줄리앙. 독특하여 쉽게 잊히지 않는 그의 그림은 다양한 굿즈로 제작되어 이미 내게 익숙했던지라 문화초대에 응하기까지 많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난 9월 27일 시작된 <장줄리앙의 종이세상>은 그의 일리스트 속 '페이퍼 피플(Paper People)'을 주제로 한 마지막 전시로, 그의 페이퍼 피플 세계관의 핵심을 총망라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고 방문했다. 해당 전시는 2025년 3월 30일까지 금천구에 위치한 퍼블릭가산에서 진행된다.
총 세 공간으로 나누어진 이 전시는, 출입구를 지나면 바로 들어서게 되는 페이퍼 팩토리(Paper Factory)로 그 포문을 연다. 페이퍼 팩토리는 말 그대로 종이세상을 살아가는 종이인간이 만들어지는 공장이다. 주홍색의 페이퍼 피플이 각자의 위치에서 종이를 오리고, 색칠하고, 눈을 그려넣으면 어느새 파란색의 페이퍼 피플이 완성된다.
아기자기한 그림체, 파스텔톤의 색감과 대조되는 거대한 규모에 압도되는 것도 잠시, 페이퍼 팩토리 구석구석을 돌아보다보면 어딘가 섬찟한 기분이 든다. 같은 공정을 통해서 같은 색깔, 같은 크기로 만들어져 일렬로 늘어선 페이퍼 피플. 이들은 무엇을 위해서 태어나는가?
답을 찾을 수 없어 질문을 바꿔본다. 이들을 만들고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왜 이들을 만들고 있는가? 여전히 답을 알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누군가는 만들고 누군가는 만들어지는 이 상황이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그리 다를 것 없다는 떨떠름한 결론에 닿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과 닮아있다고.
환풍기 바람에 팔랑이는 페이퍼 피플이 귀여워보이다가도, 왠지 기묘한 감정을 느끼며 다음 공간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페이퍼 피플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공간이 페이퍼 팩토리라면, 두 번째 공간인 페이퍼 시티(Paper City)는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그들이 만들어낸 커뮤니티를 재현한다.
사실 이곳은 전혀 특별한 것이 없다. 왜냐하면 페이퍼 피플의 삶이 그리 특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페이퍼 시티 속의 그들은 서점, 꽃집, 영화관 등 현실 속 인간과 유사한 일상을 꾸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 도시의 주민들은 행복하게 웃기도 하고, 눈쌀을 찌푸리기도 하며 다양한 감정을 표출한다. 동화적인 공간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이곳이 마냥 해맑게 살아갈 수 있는 유토피아는 아니었나보다.
이쯤 되니 작가 장줄리앙의 의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페이퍼 피플은 우리와 다른, 대단하거나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그들이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존재임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럼 현실의 삶이 그대로 옮겨진 이 전시장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페이퍼 피플로 구현된 우리의 모습은, 스스로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 우리를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 해준다.
세 번째 공간 페이퍼 정글(Paper Jungle)에는 거대한 뱀 하나가 놓여있다. 그 뱀의 한쪽 면에는 우주가 발생한 순간부터 지구 위의 생물들과 인간이 등장하고 사라지며 쌓아온 역사가, 또다른 면에는 종이가 만들어지고 그 종이 위에 인간이 그림을 그려 등장한 페이퍼 피플의 역사가 담겨 있다.
새싹이 자라 나무가 되고, 나무가 잘려 공정을 통해 만들어진 종이 위에 그려진 사람의 형상 하나. 곧 구겨지고 만 낙서 위의 그는 종이에서 벗어나 걷기 시작한다. 친구를 그려내고, 사람들을 그려내 인간의 역사와 동일하게 사회를 구성하고 발전해나가기 시작한다.
그 친구는 거대한 뱀에 그들의 이야기를 남긴다. 우리는 그가 남긴 기록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머리가 네모난 종이 인간의 이야기다. 이 네모 인간이 바로 낙서에서 나온 종이 인간이 처음으로 그려낸 친구다. 그 역시도 다른 종이 인간들을 그려내며 첫 번째 종이 인간과 함께 한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의 네모난 머리다. 동그란 머리를 가지고 있는 다른 모든 종이 인간과 달리, 오로지 그만이 사각형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 그 덕분에 그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본인의 모습에 불만스러워보인다. 스스로의 그림도 마음에 들지 않고, 얼굴마저도 싫은 모양이다. 첫 번째 종이 인간처럼 그림도 잘 그리고, 얼굴도 동그란 인간이 되고 싶은 듯하다. 얼굴을 마구 때려 동그랗게 만들어보려고 하기도 하지만 남은 건 얼굴의 상처 뿐이었다.
결국 그는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가위로 얼굴 주변을 동그랗게 오려낸다. 드디어 본인이 원하는 얼굴을 얻은 그는 그제서야 스스로를 보며 웃는다.
전시를 관람하는 내내 네모 - 이제는 동그란 - 인간이 왜 그리 동그란 머리를 바랐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다. 작은 한 가지에 사로잡혀 속상해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마지막 웃음에도 마음 편히 축하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거쳐온 고민과 자책의 순간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기 때문일 테다.
이렇게 나는, 이 공간에서도 나와 닮은 종이 인간을 발견했다.
종이세상으로 직접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동화적인 연출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을 들뜨게 하는 전시다. 거침 없이 그은 듯한 굵은 획과 알록달록한 색감으로 구성된 그림도 눈을 즐겁게 해준다. 그래서인지 아이들과 함께 전시를 즐기러온 관람객도 여럿 눈에 띄었다.
한편 한 가지 더 기억에 남는 점은 전시에 대한 아무런 해설도 제공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각 공간의 입구에 쓰인 짤막한 설명을 제외하면, 작가는 아무런 언어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않았다. 저마다의 표정을 짓고 있는 페이퍼피플에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벽에 그려진 그림들의 의미는 무엇인지는 오로지 관람객의 상상과 추론에 의해서 파악되어야만 했다.
그래서일까, 함께 전시장을 방문한 동행인과의 대화가 유독 즐거웠다. 커다란 뱀을 따라 이야기를 읽어내고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곧 뒤에서도 각자의 해석을 나누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으로서 페이퍼 피들과의 닮은점을 찾으며 발생하는 동화(同化), 그리고 관람객끼리 또 한 번 비슷한 점을 발견하며 느끼는 동화까지. 우리는 모두 다르지만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다시금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누구와 닮았고, 우리가 누구와 닮았는지 새롭게 알아볼 수 있는 이 종이세상에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한 번 방문해보길 권해본다.
아트인사이트 | https://www.artinsight.co.kr
본 포스트는 아트인사이트에서 초대권을 무상으로 지원받고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