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구의 시작점을 찾아서
대한민국 최고의 프로 스포츠, 야구(KBO 리그). 올해 KBO 리그는 MZ세대와 여성 팬의 유입, 야구 예능 프로그램의 인기 등 긍정적인 요소들에 힘입어 리그 출범 43년 만에 처음으로 천만 관중 시대를 열었다.
이번에는 야구의 역대급 흥행을 맞이하여, 비록 현재는 사라졌지만 우리나라 야구에서 성지와도 같은 곳으로 여겨지는 '동대문야구장'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동대문야구장이 생겨난 배경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선,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조선시대 당시 동대문 일대에는 '훈련원'과 '하도감'이라는 군사시설이 있었다. 하지만, 이 시설들은 일제강점기 때 사라지게 된다. 조선총독부가 일본 왕세자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군사시설들을 헐고, 그 자리에 운동장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1925년에 지어진 운동장이 바로 한반도 최초의 근대식 운동장, '경성운동장'이었다. 그리고 종합운동장 형태의 경성운동장 건립 당시 바로 옆에 야구장도 같이 지었으니, 이것이 경성운동장 야구장(당시 명칭), 다시 말해 오늘의 주인공인 동대문야구장의 시작이었다.
시간이 흘러 해방이 되고, 경성운동장 야구장은 '서울운동장 야구장'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이때부터 야구장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1960~70년대에 들어서 정부의 스포츠 육성 사업으로 인해 각종 스포츠 대회가 개최됐는데, 이 중에서도 특히 고교야구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무수히 많은 고교 야구 대회들이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진행되었고, 그 속에서 선동열, 최동원과 같은 슈퍼스타들이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슈퍼스타를 앞세운 고교 야구는 프로야구 창설의 밑거름이 되었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 역사적인 개막전이 펼쳐진 곳도 바로 서울운동장 야구장이었다. 당시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의 개막전에서 연장 접전 끝에 MBC 청룡이 짜릿한 끝내기 역전승을 거두며,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강렬한 기억을 안겨주었다. 프로야구의 성공적인 출범과 함께 서울운동장 야구장 역시 탄탄대로를 걷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야구장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1980년대에 들어 '1986 아시안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의 개최가 확정되었다. 그리고 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1984년, 잠실에는 서울종합운동장이 완공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서울운동장의 이름은 '동대문운동장'으로 바뀌게 되고, 야구장의 명칭 역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동대문야구장'으로 바뀌었다. 동대문야구장으로 이름이 바뀌고 나서부터는 프로 경기 대신 주로 아마추어 경기가 열렸다. 각종 프로 경기들이 동대문 대신 잠실에서 열렸기 때문이었다. 동대문에서는 프로 경기에 비해 비교적 인기가 적은 아마추어 경기들이 열리면서, 동대문야구장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점점 줄었다. 그리고 이는 경기장의 수익 감소로 이어졌다.
이후 적자 운영과 시설 노후 문제가 계속되자, 동대문운동장 및 야구장과 관련하여 재개발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재개발 반대에 대한 목소리도 높았지만, 서울시는 동대문운동장 일대를 재개발하여 세계적인 디자인 패션 산업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한 DDP(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건립 계획을 발표했다. 결국 동대문야구장은 DDP 건립 계획에 따라 2007년에 철거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14년 3월, 동대문야구장이 있던 자리에는 DDP와 운동장 철거 후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물을 모아놓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들어섰다.
이제는 볼 수 없는 동대문야구장. 하지만 야구장에서 사용했던 조명탑이 DDP 옆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과거 이 자리에 야구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천만 관중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제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프로야구. 비록 지금은 사라졌지만, 프로야구가 지금의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동대문야구장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YECCO 콘텐츠기획팀 양호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