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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a Jan 31. 2024

편지 열넷,

-드라마 '안나'에서 만난 나-

 



1986년의 일입니다. 여섯 살, 여자아이는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곁에서 밥을 얹은 숟가락을 건네는 엄마한테 말하지요. “배 안 고파.” 곁에서 양복을 다듬고 있는 아빠가 말합니다. “유미, 그렇게 밥 안 먹으면 일 년 동안 땀 흘려 농사지은 농부 아저씨들이 얼마나 속상할까?” 그 말에 아이는 말합니다. “에이~ 아빠. 농부들은 팔면 그만이에요. 농부들은 내가 밥을 먹는지 안 먹는지 그거 몰라요.” 영특한 아이의 말에 아빠는 웃고 맙니다.


 


그 아이는 홍천시장에 하나뿐인 백마양복점 외동딸 이유미입니다. 유미는 양복을 맞추기 위해 들린 필립스 대령의 부인인 캐서린의 제안으로 그녀의 집을 드나들게 됩니다. 캐서린은 피아노나 영어를 가르쳐주기도 하고 포커를 알려주기도 하지요. 그녀는 이유미의 삶에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발레, 그림도 배우며 앞으로 할 게 많다고 하는 그녀에게 남편은 다그칩니다. “당신 한국 생활이 외로운 건 알지만, 사람들에게 거짓말하면 안 되잖아. 당신은 귀족도 아니고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친척도 아니라고!” 캐서린은 두 눈을 부릅뜨고 고함치듯 말합니다. “난, 이 시골이 싫고, 여기 사람들이 날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면 해!” 그 말에 어이없다는 듯 남편은 말합니다.


 

“누가 당신을 함부로 대해? 넌 망상에 병적인 거짓말쟁이야!”


 

이 허언증을 지닌 캐서린은 유미한테 ‘포커페이스’를 알려주게 되지요. “아까 에이스를 받았을 때 넌 표정이 변했어. 네가 뭘 들고 있는지 상대가 몰라야 이길 수 있어. 포커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네 속마음을 들키지 마!” 그녀가 이사하면서 유미 집에 피아노를 고가로 팔면서도 마지막으로 유미한테 남긴 말도 “기억해! 포커페이스”입니다.


 


유미는 어떻게 자라났을까요? 하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많고, 남의 주목을 받고 우아하고 예쁜 것을 원하는 소녀가 되었습니다. 1994년, 14살 때는 아버지한테 떼를 써서 라 에스메랄다로 발레 공연을 해서 상을 타게 되지요. '라 에스메랄다' 곡조는드라마 곳곳에 흩뿌려지듯 등장합니다. 고3 때는 미대에 가기 위해 미술학원을 다닙니다. 형편없는 그림 실력에 학원 강사는 왜 그림을 하고 싶어하냐고 딱한 눈빛으로 묻지요. “예술은 아름답잖아요. 전 아름다운 게 좋아요.”라고 답하는 유미한테 강사는 그건 허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공부를 잘하니, 잘하는 것을 해라고 하지요. 유미는 당차게 대꾸합니다. “쌤. 저는요. 내가 마음 먹은 거 다 해요. 항상 그랬어요.”


 

위트릴로,

이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압니다. 유미는 마음먹은 것을 다하지 못하지요. 모든 이가 그러하듯이 말이지요. 유미는 갓 부임한 음악 교사와 사귀게 되지만, 들키게 되자 교사는 유미가 먼저 접근한 거라며 유미 탓을 하며, 항의하는 유미한테 짜증 섞인 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시종일관 윗사람한테 죄송합니다를 연발하지요. 그 일 때문에 서울로 전학을 해서 하숙집에 머무르게 됩니다. 목표했던 대학은 연거푸 두 번이나 떨어지게 되지요. 합격 소식을 묻는 아빠한테는 차마 사실대로 말하지 못합니다. 대학 입학식에 나타난 부모님과 꽃다발을 들고 사진까지 찍지요. 아마, 유미는 그랬을 겁니다. 내년에는 반드시 입학할 거니까 미리 합격 소식을 알리는 것일 뿐이야. 그런데 상황은 예기치 않게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같은 하숙집에 있던 한지원이 하숙집 주인으로부터 전해 듣고 유미를 자신의 학교 후배라고 여기게 된 거지요. 얼떨결에 교지편집부로 들어가서 신입생 환영까지 받고, 신입 기자가 되고 맙니다. 미학과라고 하는 소개하는 바람에 임기응변을 위해 ‘미학 오딧세이’ 책을 보던 유미한테 선배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내밉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이 책은 네트워크 마케팅의 고전과도 같은 책입니다. 혹은 폰지 사기 단체에서도 입문서처럼 여기는 책이지요. 변화하기를 꿈꾸는 자에게 새로운 삶이 선물처럼 다가오니 새로운 자신이 되기를 바란다면 변화를 두려워 말고 행동으로 옮기라는 교훈이 담긴 우화이지요. 이 책은 또 얼마나 강렬하게 유미한테 다가왔을까요?


 

유미는 지원 선배의 권유로 서울지부총회에 참석하고, 재호를 만나게 됩니다. 교환학생으로 뉴욕에 가게 된 재호의 제의로 함께 어학연수를 가게 되지만, 비행기 탑승을 앞두고 유미의 거짓 학력이 들통나고 맙니다. 그런지 일주일쯤 뒤에는 암이었던 유미 아버지마저 작고하고 맙니다. 2002년 1월 17일입니다. 유미는 아버지의 유골함 앞에서 오열하며 말합니다. “이제, 그냥 열심히 살아볼게. 그동안 미안했어.” 마침, 재호가 전화를 걸어왔고 따져 묻는 말에 유미는 말하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됐다고 답합니다. 그런 유미한테 재호는 ‘미친년’이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습니다. 사랑은 순식간의 감정이고, 사랑을 유지하게 하는 것은 재력이나 학력이나 권력일까요?

유미의 엄마는 치매에 걸렸고, 나중에는 요양병원까지 가게 됩니다. 유미는 이제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몇 가지 아르바이트를 하지요. 그러다가 ‘마레 컬렉션’이라는 곳에서 학력 무관으로 직원을 뽑는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갑니다. 소품 숍을 운영하는 이현주 이사의 개인비서로 근무하게 되지요. 남대문 시장에서 6만 6천 원에 산 작은 병이 현주의 말 한마디로 그곳에서 26만 원으로 둔갑하는 것을 보면서도 묵묵히 일합니다.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인 고급 가구들 이름을 외우며 명품 칠갑으로 지내는 현주의 모습도 가까이에서 보게 되지요. 여섯 살 적 캐서린한테 배워서 쳤던 ‘작은 별’ 멜로디는 때로는 슬프고 느리게, 때로는 가볍게 드라마의 전반에 불쑥불쑥 나타납니다. 유미는 여전히 마음먹은 대로 다 되지 않는, 아니, 전혀 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을 뿐입니다. 유미의 하늘에는 별이 없습니다. 유미의 인생도 빛나지 않지요.


 

그러던 유미가 다른 창고에서 치즈를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엄마한테 온 휴대폰 문자를 보고 휴가를 받으려고 현주의 부친인 ‘작가님’한테 부탁을 하다 퇴짜를 맞습니다. 그것도 매몰차고 수치심을 가질 정도의 심한 말을 듣게 되지요. “왜 날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일하는 조건이 뭐였는지 기억 안 나? 아냐아냐, 그냥 넘기지 마. 아니, 니들은 왜 약속을 안 지키니? 이해가 안 돼! 이해가! 니들 문제가 뭔지 알아? 게으르고 멍청한데 남들 하는 거 다하고 살려니까 그 모양인 거야! 평생을 그러고 살래? 평생?”


 


이 고압적인 태도와 경멸하는 눈빛이 유미의 가슴에 새겨집니다. 나중에 유미는 자신이 그런 위치가 되었을 때 가정부한테 이 말을 그대로 퍼붓고 말지요. 이런 식의 태도는 훗날 유미의 남편인 지훈이 비서나 기사한테 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유미의 상관인 현주는 선을 본 의사와 결혼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파리와 헬싱키에서 남자친구와 여행 계획을 세우지요. 그러면서 응석이라도 부리듯 유미를 보며 말합니다. “나 불쌍하지? 응? 있잖아. 행복은 항상 좀 애매하잖아. 근데 불행은 되게 확실하다? 나 요즘 완전 불행해.” 현주의 불행은 원하지 않는 결혼 때문에 있지만, 실은 현주의 삶은 그 자체가 불행이었지요. 기부금 입학에 돈을 주고 산 논문으로 딴 학위, 그리고 애정 없는 결혼.

유미는 성탄절, 상관들이 집을 비운 사이에 모인 직원들 사이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김실장님은 이렇게 몰래 먹는 와인이 맛있어요? 저는요. 이렇게 평생 살 자신이 없어요. 남들이 나를 두려워했으면 좋겠어요.” 여섯 살 적 만난 캐서린이 사람들이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던 그 말이 유미한테는 한층 더 진화되었던 것이지요. 유미는 급기야 짐을 싸 들고 그곳을 나옵니다. 현주의 학위 증명서를 가진 채 말이지요. 그리고 오래전, 같은 하숙집에 있었던 지원을 찾아가지요. 오랜만에 만난 지원한테 자신은 미국에서 학위를 따고 왔다고 둘러댑니다. 지원의 소개로 유학생 전문 미술학원에 강사로 취직하게 됩니다. 거기에서부터 승승장구하게 되지요. 유미는 이제 안나로 개명을 합니다. 현주의 학위증명서 이름이 ‘안나’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지요. 학생들한테 그림을 가르치기 위해 일부러 다른 미술학원을 전전하면서 강사들이 일러주는 말을 흉내 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학생한테 들려주기도 하지요.


 

“내가 불행하면 자꾸 타인에게 관심이 생긴다. 나도 옛날에 남들 때문에 불행했는데 근데 이제는 기회를 노리지. 행운을 믿지는 않아. 남 생각하지마. 오직 너만 생각해!”


언젠가 현주가 유미한테 한번 밖에 차지 않았다며 선심 쓰듯 건네준 스위스제 ‘빈센트 앤 코’라는 시계가 사실은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편, 유미는 농아인 엄마를 찾아가서 수화로 대화를 나누곤 합니다. 엄마는 갈수록 기억력을 잃어가고, 나중에는 딸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아빠가 사망하고 팔려고 내놓았던 양복점은 기차역이 생기는 바람에 정부 보상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예전 현주 집에서 내려다봤던 경복궁보다는 못하지만, 귀퉁이에 아주 조금 경복궁이 보이는 오피스텔을 월세로 얻습니다. 그러던 2012년 어느 날. 미술학원 원장의 소개로 예일대 출신 윤교수를 만나서 평생교육원 강사로 부임하게 됩니다. 다음 해에는 정식 교수가 되지요. 학과장은 교수들끼리 모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이가 들면 사회적 지위가 있어야 한다니까. 교수, 의사, 변호사. 그런 타이틀이 왜 중요한지 늙어보면 알아요. 나이 들어서 사람 대접 받으려면 응? 돈이 있든 명예가 있든!”

그 말에 윤교수는 이렇게 답합니다. 

“그래서 전 국민이 기를 쓰고 주식하고 부동산하잖아요!” 

이 학과장의 소개로 ‘아이티솔리드’ 회사를 운영하는 최지훈을 만나게 되지요. 2015년, 유미는 엄마를 만나러 갑니다. 엄마는 유미한테 수화로 이런 말을 남기지요. “아까 꿈에 엄마가 유미 봤어. 내가 사슴이 되어 멀리서 유미를 봤어. 유미, 왜 슬펐어? 울었어. 많이 울었어.”


 

엄마의 말은 맞습니다. 엄마는 사슴이 되어 유미를 만났지요. 그리고 아주 많이 슬퍼서 우는 유미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자면, 2015년 최지훈과 결혼한 때부터 해야겠습니다.

유미는 대행 부모를 사서 치밀하게 일을 꾸미지요. 그리고 무사히 결혼식을 진행합니다.

지원 선배는 중국에 취재를 다녀와서 사 온 2000년 된 티벳 불상을 유미한테 보여줍니다. 유미는 2000년이면, 티벳에 불교가 전파되기 전이라고 하지요. 그제야 지원은 자신이 속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한번은 유미가 이렇게 말한 적도 있습니다.

“선배, 그거 알아요?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라는 말은 가을에 책이 안 팔려서 만든 마케팅이래요. 이사 날에 비 오면 잘 산다는 말도 사실, 비 오면 이사하기 힘드니까 힘내라고 만든 말이고, 고진감래 그런 말도 아니라는 걸 알면 사람들이 열심히 안 살 테니까 만든 말이고.”


 

적당히 속고 속이고 사는 세상. 유미는 점점 속이는 것이 일상화된 삶 속에서 자신도 속이며 살고 있습니다. 남편 지훈은 정치로 발을 들여놓게 되고 마침내 서울시장 후보로 나가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유미는 지훈한테 말해서 지원을 최고의 신문인 보국일보 정치부 기자가 되게 해줍니다. 한편, 유미는 지훈의 언행들에서 험악한 인성이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약간만이라도 자신을 기다리게 했다는 이유로 기사의 정강이를 발로 차고 고함을 지르는 지훈의 야멸찬 모습을 보며 점점 더 포커페이스가 되어 갑니다. 지훈의 고약한 인성은 기자들의 잡담에도 드러납니다. 북한산 정상에 새해 첫날 임원진들과 갔던 지훈이 정상에서 비서한테 스타벅스 커피를 사 오라고 했다는 거지요. 비서는 하라면 해야 하니까 내려가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더니 결국 그 길로 집에 갔다는 얘기였지요. 그 얘기 끝에 유미를 지칭하며 이런 말들을 합니다.

“솔직히 이안나도 돈 많고 이쁘니까 다들 좋아하는 거잖아!”


 

돈, 권력, 외모, 학벌. 이 네 박자를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겠지요. 외면하려고 한다고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기 마련입니다. 그걸 쫓아가지 않을 이가 있겠습니까? 이 욕망의 굴레는 누구도 벗어나지 못하겠지만, 정도껏 하는 조율이 필요합니다. 정도가 지나친 것과 느슨한 것, 집착하는 것과 내려놓는 것 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조율을 긍정으로 하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방법이 필요합니다. 도대체 그 방법은 무엇일까요?


 

유미가 거짓 인생을 살고 있었지만, 양심마저 거짓이 된 것은 아닙니다. 학원에서 자신이 가르쳤던 학생이 예일대에 입학한 뒤 방학이 되어 선생님이 좋아한다고 해서 일부러 그곳에서 사 왔다며 크레이지 도넛을 선물하면서 요제프 교수님, 얀테의 법칙 운운하는 것을 들으며 움찔거립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같은 건물 위층에 사는 현주를 마주치게 됩니다. 현주를 피해서 23층을 계단으로 걸어 다니며 한숨을 쉬기도 합니다. 현주는 동문회에서 온 편지를 통해 자신의 학벌을 이용해서 교수가 된 유미의 행태를 알게 됩니다. 그 대가로 30억을 내놓으라는 억지를 부리게 됩니다. 급기야 현주는 지훈을 찾아가서 사실을 말하게 되고, 지훈은 현주를 자살사고로 위장해서 죽여버립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유미는 지훈의 뒷 조사를 하면서 ‘아이티솔리드’의 비리를 캐냅니다. 한편, 지원은 오래전 유미와 미국행을 하려다 만 재호 선배를 우연히 만나서 유미가 후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지원이 유미의 행적을 찾아서 홍천을 찾아가고, 그곳에서 엄마를 돌봐주었던 땅집 식당 주인과 고등학교 담임을 만나게 됩니다. 담임은 이런 말을 하지요. 

“유미는 예쁘고 인기가 많고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어요. ... 제 경험으로는 똑똑하다는 말 듣고 자란 애들은 자기가 쓸모 없어졌다는 생각에 몹시 취약해요.”

그러면서 유미가 서울에서 갑자기 두 세 번 정도 밤에 내려와 밤새 울고 새벽 첫차를 타고 올라가곤 했다는 사실을 들려줍니다.


 

이상한 것은 거짓 인생을 사는 유미가 짠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더 이상한 것은 유미 주위에 모인 잘나가는 이들이 모두 거짓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겁니다. 지훈은 유미와 결혼 전, 낳은 자폐아들이 있고, 사실혼 관계에 있던 임수연이 있다는 사실이 대대적으로 보도됩니다. 유미는 임수연이 제주도에서 실족사했지만, 실은 지훈이 죽인 것을 알게 됩니다. 게다가 현주를 만난 지훈이 안나가 아닌 유미인 자신을 알게 된 이후, 유미는 언젠가 자른 김기사를 대하듯이 자신을 대하는 지훈의 태도를 보게 됩니다.


 

1996년, 지훈이 병장으로 제대를 하고 집에 온 날, 김밥집을 하던 어머니는 암에 걸려 약 한번 못 쓰고 누워있고 아버지는 그 옆에서 술만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때, 명진건설 아들인 군대 동기 오명훈한테 돈을 빌렸는데, 오명훈의 권유로 부동산 투기, 청약통장 장사하는 바닥으로 뛰어들게 됩니다. 오명훈은 이렇게 말하지요.


 

“정치하는 놈 삶아가꼬 규제 풀고. 뭐 빨리 지어가꼬 팔고. ... 니 우리 아버지가 부산시장한테 해마다 돈 얼마 갖다 바치는지 아나? 이게요. 안 걸리면 위법이 아이거든. 이 바닥이 그르타.”

지훈은 그 말을 듣고 복학을 취소합니다. 인생 목표를 정했다는 말을 남기면서요. 지훈이 정치판으로 뛰어든 것도 오명훈의 말이 결정적인 작용을 합니다. 나중에 오명훈의 아버지는 부산 시장이 되지요. 오명훈이 예전에 상병 때 선거할 때 여당을 찍으라고 해서 정치에 관심 없다고 하니, 그런 말은 노동자나 하층민들이나 하는 소리다 라고 해서 이상하게 그때부터 그 말이 자꾸 생각이 났다는 거지요. 그래서 그때 처음으로 정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거라고 하며 유미한테 말하지요.


 

“뭐, 국가 존재니 사회질서니, 이런 건 다 순진한 소리고. 그 본질은 뭐다? 니 좋아하는 거. 이익추구!”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인 지훈이 한창 선거운동에 열을 올리고, 유미에게는 아예 학교를 그만두고 갈 자리에 참석하라고 통보하지요. 그런가 하면 지훈은 경쟁자인 우리야당의 이정일 후보 부동산 서류를 지원한테 내밀며 단독 기사를 쓰라고 제의하지요. 지훈의 소개로 보국일보 기자가 된 줄 몰랐던 지원이 그걸 거절하자 지훈은 엽서에 이 말을 써 줍니다.


 

‘힘 없는 자의 용기만큼 공허한 것이 없다. 세상을 바꾸려거든 힘부터 기르시오. 고작 당신 정도가 떼쓴다고 바뀔 세상이었으면 난세라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정도전-’ 



나중에 우연히 들린 식당에서 드라마 정도전의 재방송이 흘러나왔고, 지원은 어이없어하며 화를 냅니다. 그 엽서의 말은 ‘죽기를 각오한 자의 충언만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라는 정도전의 말에 재상서열 2위인 수문하시중, 이인임이 답한 말이었습니다.

지훈의 혼외 자식 말고도 불거진 것은 지훈의 처 안나(유미)의 논문대필이었습니다. 황급하게 알렉스 화이트라는 논문 브로커를 찾아서 대필이 아니라 스터디 파트너였다는 것을 알리는 인터뷰 방송을 내보낼 거라는 사실을 정이훈 비서가 보고합니다. 유미는 지훈이 시키는 대로 자신은 이미 자폐아인 지훈의 아들을 알고 있었고, 함께 돌보고 있다고 인터뷰를 하지요.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붙여 놓은, 이름이 자신과 같은 조유미 비서한테 유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걱정 마요. 나는 내가 알아서 살아남아요. 혹시 내가 무슨 일이 생기면 아까 그 환자 챙겨줄래요? .... 글쎄. 생각 안하려고. 사람은 상상력이 있어서 비겁해지는 거래. 그리고 자기도 부모님께 주눅 들지 마요. 독립은 부모의 실망에 죄책감을 갖지 않는 것부터가 시작이에요. 나는 그게 제일 후회돼.”

그러니까, 이 모든 거짓의 퍼즐의 시작은 하숙집에서 합격 여부를 묻던 아빠한테 합격이라고 말한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은 유미의 말은 맞지 않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에 의하면, 인간이 상상력이 있어서 비겁해지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은 애초의 이미지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능력이며, 상상력으로 인해 인간을 과거와 현재로부터 떼어내어 미래를 열게 만들기 때문이지요. 상상은 축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에너지입니다. 유미가 그런 상상력을 부정적으로 말했던 것은, 스스로 부정에너지로 매몰된 삶이기 때문이겠지요.

새벽 4시 52분. 거주하는 건물 주차장에서 유미는 죽은 현주의 환영을 만납니다. 죽은 현주는 이렇게 말하지요.


 

“어리석고 가엾다고 모든 게 용서되는 건 아니야. 단테의 ‘신곡’을 읽어서 그런가. 사람들은 지옥을 공간이라고 생각하잖아. 공간이 아니라 상황인데. 벌써 울지 마. 이제부터 지옥이야.”

그렇습니다. 유미는 지옥 안에서 살고 있지요. 부러운 대상을 가지려는 큰 욕망 때문에 진실은 죽고, 거짓으로 떠돌던 순간부터 지옥으로 들어섰던 거지요.

마침내 유미는 이렇게 중얼거리지요. “내가 그것을 정말 원했는지는 가져보면 알게 된다.” 유미는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부, 권력, 명예들이 큰 한숨과 죄책감으로 돌아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모습이 자신이 원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후 유미는 지원을 찾아갑니다. 유미가 안나가 된 것에 대해 둘은 대화를 나누지요. 지원은 왜 그랬냐고 묻습니다. 유미는 이렇게 답하지요. “설명하기 어려워요.... 노력했는데 잘 안됐어요... 이현주가 부러웠어요.”  

지훈의 주가조작, 횡령, 탈세, 자신이 받은 뇌물수수에 대한 자료들이 몽땅 들어있는 파일을 지원한테 건네줍니다. 선거 직후 취임 전에 방심할 때 터뜨리면 좋겠다고도 합니다. 지원이 이걸 왜 자신한테 주냐고 묻자 유미는 이렇게 답합니다. 

“선배는 ‘유미야’하고 내 이름을 불러주고 걱정해준 유일한 사람이니까. 이게 선배와 이현주에 대한 사과예요.”

유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다정하고 따뜻하고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랑이었을 겁니다. 그것을 모른 체 욕망에 따라 살아온 삶이었지요. 실은, 겉도는 마음 때문에 자기도 자신한테 속은 겁니다.


 

지훈은 결국 서울시장이 됩니다. 그리고 선거 발표가 난 그 시간 강원도 하나 요양병원에 있던 유미의 엄마 홍주는 사망합니다. 서울시장이 되자마자 아들을 데리고 온다는 빌미로 지훈은 유미를 데리고 미국행 비행기를 탑니다. 엄마의 사망 소식은 비서를 통해 듣고, 어머니한테 가지도 못한 상태에서 출국하게 되지요.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려 레이크 타호까지 6시간 동안 직접 차를 운전하기 위해 지훈은 차를 빌립니다. 그러는 동안 유미는 지원이 비밀 파일을 들고 이덕찬 검사를 찾아갔으나 윗선에서 막힌 사실을 알려온 문자를 읽고 있습니다. 지원은 사실 폭로가 어려워지자 급기야 자살 소동까지 벌려서 결국 세상에 최지훈 게이트를 알리게 됩니다.

지훈은 운전을 하고 가다가 유미한테 통보하듯 말합니다. “니는 좀 쉬는 게 좋을 것 같애. 민재는 저번 기사 났을 때 이미 호주로 옮겼지. 새로 지은 데 가서 시설도 좋고, 근처 경치도 좋다. 사람이 말이야. 너무 자기 자신한테 집중을 하게 되면 우울해진다고. 공기 좋은데 가서 푹 쉬면서 잘 생각을 해봐. 니 미국은 처음 오제?” 



그 순간, 길 한가운데 노루가 나타납니다. 언젠가 유미의 엄마가 꿈속에서 말했듯이요. 노루를 피하다가 지훈은 전봇대 기둥을 들이받게 되지요. 오른팔을 다친 지훈이 운전석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틈에 유미는 혼자서 빠져나옵니다. 그리고 라이터로 스카프가 달린 핸드백에 불을 붙여서 지훈을 향해 걸어갑니다.


 

“사람은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씁니다. 하지만 진실은 간단하고 거짓은 복잡합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떠한 상황에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렇게 견디면 기회는 반드시 옵니다. 항상 그랬어요. 난 마음 먹은 건 다 해요.” 



그리고 지훈을 향해 불이 붙은 핸드백과 라이터까지 던지지요. 2017년 미국 현지시각 6시 10분. 캘리포니아 50번 국도에서 최지훈 서울시장 당선자는 그렇게 사망하게 됩니다.


드라마의 마지막은 이러합니다. 유미는 눈길 위를 씩씩하게 걸어와서 썰매에 장작을 싣고 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백인 여자 둘은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지요. 

“저 꼬마가 미국에서 걸어왔다는 그 중국인이야?” 

“응” 

“거짓말이야. 저 꼬마가 어떻게 여기까지 걸어와.”


유미는 꼬마도 아니고 중국인도 아닙니다. 그 밖에 많은 것들이 거짓일 겁니다. 진실만 말하기에는 이 세상은 적합한 곳이 아닙니다.

아마도 캐나다일 것 같은 삼림지대, 유미가 키우는 검정 개 제이크가 꼬리를 흔들며 나타납니다. 통나무 가게 안에서 유미는 난로 안에 장작을 집어넣고 있습니다. 장작에 불이 붙고, 공기가 훈훈해집니다. 유미는 ‘open’으로 간판을 바꾸고 모자를 벗습니다. 그녀의 오른쪽 이마에는 사고 난 날의 흔적이 흉터처럼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위트릴로,

드라마 ‘안나’를 이토록 길게 쓴 이유는 이유미는 허언증 환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욕망에 사로잡혀서 살았지만, 양심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고 그래서 지옥을 경험해야 했지요.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서 한숨을 쉬기 일쑤였습니다. 제일 마지막 장면까지도 한숨으로 마치고 있지요.

누구나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욕망, 유미는 인간의 어두운 그림자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재력, 학벌, 권력, 명예를 가지고 싶은 마음, 그걸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진실이 간단하듯이요. 마음에 지옥이 아니라 천국을 두기 위해서라면, 자주 영혼을 떠올려봐야 합니다. 영혼이 마침내 머물 곳, 육체를 벗은 다음에 영혼이 갈 곳을 자주 ‘상상’해봐야 합니다. 상상이 잘되지 않는다면, 물질을 내려놓는 것부터 상상해봐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들, 보이는 것들이 죄다 없어진다는 상상을 하면, 가벼워집니다. 그런 상상의 버릇이 들게 되면, 그악스럽게 매달렸던 것들이 힘을 잃게 됩니다.


 

위트릴로,

그래서 결국 보이지 않는 소중함들이 가슴을 채우게 될 때가 오고, 그제야 ‘마음먹은 것’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럴 때, 지난한 극복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예술인지 깨닫게 될 테지요. 그래서 드라마 ‘안나’에서 나를 만납니다. 내 욕망의 불씨를 조금씩 꺼지게 할 영혼의 보루를 기억합니다.


  


-2023. 7. 21. 시아-



        



 * 이 편지는 어머니에 대한 양가감정을 극복하고 만성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해방한 모리스 위트릴로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경계성 인격장애’인 구순이 넘은 제 어머니와 연관되어 치유와 관련한 체험을 공감해줄 위트릴로한테 띄우는 간곡한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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