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룩스 이야기-13]
용서
시아
한창 열 받아 있는 이들한테 꺼내면 더 열 받는다. 영락없이 불 난 집에 하는 부채질이 된다. 여전히 화가 났는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좋은 방법이 바로 이럴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대뜸 이렇게 소리치기 일쑤다. 지금, 그 말이 입 밖에 나와요? 어디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내뱉고 그래? 으레 그다음 말은 욕설이다.
때때로 이 말에 대한 반응으로 미소를 지으며-눈은 결단코 웃지 않고, 입꼬리만 살짝 올린 채-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보는 이가 아무도 없다면, 그럴 필요도 없다. 미소도 끄덕임도 당연히 하지 않는다. 그러니, 머리로는 할 수 있지만 여간해서는 가슴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오래된 상황이나 사건일수록 그렇다. 기억과 감정의 지층이 두꺼울수록 잘되지 않기 마련이다. 존경할만한 누군가로부터 설교나 충고를 들은 다음 하려는 마음을 내기도 한다. 그럴 때도 역시 ‘머리’가 움직이는 것이어서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기란 무리다. 게다가 누군가 마음을 내보라고 조금 더 강하게 설득을 한다면, 대번에 반발감이 치솟는다. 그게 쉬운 게 아니라고! 내가 뭐 신이라도 되는 줄 아나?
섣불리 서둘러 하려고 애쓰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체한다. 여기에 체하면 약도 없고, 더 곯고 썩어 문드러진다. 체면상 한다고 했지만, 속이 아프고 쓰리다. 내가 왜 그래야 해? 굳이 내가 그래야 할 이유가 뭐야? 이런 의문이 꼿꼿하게 고개를 쳐든다. 그러다가 분명히 한다고 선포하듯 주위에 알렸다면, 낭패감은 심각해진다. 겉과 속이 다른 채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불안, 불평, 불편, 불면, 불쾌... 등등 온갖 ‘불’자가 앞에 붙는 감정에 시달리고 만다. 속으로 끙끙대다가 화병이 되기 쉽다. 차라리 안 한다고, 못한다고 하는 편이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처럼 환장할 일이 있겠는가.
더 이상한 것은 내가 나를 속이는 일이다. 분명히 한다고 했는데, 그 일이 악몽처럼 불쑥거리며 찾아온다. 안 했던 때와 했던 때가 별반 다르지 않다. 그 일이 깡그리 묻어지거나 상대방이 잘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면 속이 확 뒤틀린다. 뭐, 나한테 그렇게 해놓고 잘 먹고 잘 산다고? 이런... 다음에 나도 모르게 바로 욕이 튀어나온다. 그랬다가 손을 입으로 틀어막고는 아차! 내가 한다고 했는데 또 이러네! 라며 자신을 달래보지만, 소용없다. 억지로 참는 것은 힘든 까닭이다. 게다가 참고 참으면 결국 병이 되고 만다.
할 것은 하겠지만, 못 할 것은 당연히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을 그렇게 해? 이건 절대로 하지 못하지! 이렇게 논리를 편다면, 맞다. 죽을 때까지, 아니,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하고 만다. 이걸 할 수 있다고? 그게 사람이냐!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다고 하지 않았나! 거, 왜 변영로의 ‘논개’라는 시가 있지 않냐! 라고 핏대를 올리며 노려본다면, 맞다. 죽음마저 불사할 정도라면,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데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여러 명분이 끼어들면 더욱 그렇다. 적과 아군이 명확한 전쟁터라면, 이뤄질 수 없는 일이다. 포화가 터지고 곳곳에서 죽어 나가는 꼴을 보면서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삶은 전쟁이고, 세상은 전쟁터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극단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분명히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이들이 입에 담는 관념일 뿐이다. 참혹한 전쟁을 체험한 이들의 대부분은 너무나 간절하게 평화를 그리워한다. ‘대부분’이라는 말을 넣은 것은 만에 하나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드물지만, 그런 이들은 결단코 이것을 하려 들지 않는다. 이걸 한다고? 누구 마음대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아직도 나는 전쟁의 한가운데 들어가 있다고! 이렇게 외치고 있기에 세상에 잘 적응할 수가 없다. 이들을 가리켜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라고.
누구든 처음부터 잘되지 않는다. 이것과 정반대의 마음을 품고 있다 보면, 스트레스의 수위는 점점 높아져서 정신과 육체가 아프게 되기 마련이다. ‘정반대의 마음’이란 한마디로 하면 ‘화(火)’인데, 이 불은 품고 있을수록 자기 자신을 태우고 만다. 실의와 허무, 낙담과 우울이 덩달아 찾아온다. 불붙은 마음을 꺼지게 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게도 물 같은 마음이다. 그 물이 바로 이것이다. 물이 모이면 결국 모든 것을 다 받아주는 ‘바다’로 흘러갈 수 있다. 바다의 원대한 에너지는 결국 하늘과 만난다. 하늘, 우주의 기운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극히 종교적인 이는 이렇게도 말한다. 누가 누구를 그렇게 하라는 말이냐. 상대를 그렇게 한다는 것은 오히려 상대를 무시하는 게 아니냐? 상대가 잘못했고 내가 잘했으니 기꺼이 내가 그렇게 해주겠다고 하는 것은 오만한 것이 아니냐? 일체중생의 불성(佛性)은 똑같으니, 누군가를 그렇게 하는 것은 맞지 않다. 다만, 악행을 지은 원수라고 할지라도 사랑하라. 그러면 되는 것이지 일부러 이 말을 쓸 필요가 없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라면, ‘사랑’ 안에 이것이 아주 곱게 잘 녹아있다. 인간의 언어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용을 나타낼 수는 없기 마련이다. 조악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말로 숭고한 마음을 감히 표현한다면, 이것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말이 절묘하게 사용된 순간이 성경, 누가복음 23장 34절에 나온다.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은 로마 군인한테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드린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사실, 예수님이 하신 이것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 나이와 학식과 명예, 권력이라는 세속적인 것과 전혀 상관없는 것이 ‘영적인 성숙’이다. 미숙하고 어리석은 영혼, 이를 ‘어린 영혼’이라고 칭하자. 다시 말하지만, 나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어리디어린 영혼이기에 부정적인 어떤 일을 저지르게 되고, 게다가 자신이 한 일이 어떤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걸 대하는 영혼이 보다 성숙하다면, 예수님처럼 기도할 수밖에 없다. 어쩌겠는가. 모르고 그러는 것을. 함부로 헝클어놓고 치우지도 않는 두 살배기 아이한테 왜 그랬냐고 화낼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그 어린 영혼은 이것을 하는 상대를 보고는 비웃거나 놀리거나 오히려 욕할 수도 있다.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로마 군인들이 희롱하듯이. 차라리 네가 너를 구원해보라며 침을 뱉고 삿대질하듯이. 원숙한 영혼이라면, 그런 반응에 놀아나지 않을 것이다. 불끈 치솟아 오르는 화를 억지로 참고 다시 이것을 하려고 마음을 내는 것이 아니다. 더욱 간곡하고 더욱 애달프게 오로지 이것만을 위해 기도할 뿐이다. 내가 이것을 베풀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직접 하시도록 내맡길 뿐이다.
지독한 일에서 이것을 한다면, 이것을 통해서 지극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신라 제49대 헌강왕 때, ‘처용’이 그러했다. 879년에 왕은 울산 개운포에서 용왕의 아들인 처용을 처음 만났다. 왕은 그에게 급간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결혼을 시켜주었다. 하루는 처용이 밤늦게 집에 돌아와 보니 댓돌 위에 신발이 두 켤레가 있었다. 한 켤레는 아내의 것이었지만, 나머지 한 켤레는 낯선 사내의 것이었다. 방문을 열어보니 네 다리가 얽히고설켜 있었다. 처용은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와서 달을 바라보았다. 세상 모든 것처럼 보름달조차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물어뜯는 듯했다. 아내도 간수 못 하는 얼뜨기라는 욕이 들려오는 듯도 했다. 다음 순간, 처용은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온갖 악담과 비난 대신 가슴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는 하늘의 에너지를 받기 시작했다. 어느덧 너울너울 춤을 추기 시작했다. 결단코 할 수 없지만, 이것에 대한 발동이 걸리기만 하면 나머지는 하늘이 이뤄주는 것이다. 그러니 춤추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을 것이다. 신이 주는 바람, 신바람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다 보니, 누군가 후다닥 뛰쳐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문 앞에는 다소곳이 앉아있는 아내가 있었다. 도망간 이는 역신, 질병을 전파하는 신이었다. 그로부터 처용의 얼굴을 그려서 대문 앞에 붙이면 질병을 물리쳤다고 전해진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기이(紀異)2> ‘처용랑망해사(處容郞望海寺)’에 이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것이 치유로 연결되는 세계 유일한 기록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프레드 러스킨(Fred Luskin)은 이것이 과거를 받아들이면서도 미래를 향해 움직일 수 있도록 감옥 문의 열쇠를 우리 손에 쥐여준다고 했다. 이것을 하고 나면 두려워할 일이 적어진다고도 했다. 이것을 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마음의 감옥에 갇힌 꼴이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심리상담가인 딕 티비츠(Dick Tibbits)는 이것에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단계를 밟아 가면 분노와 적대감을 다만 억누를 때 발생하는 심각한 건강 문제를 줄일 수 있다고도 했다. 딕 티비츠의 표현대로라면, 이것은 선택이다.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삶을 바꾸려면 반드시 해야 한다. 삶을 누리기 위해서라도 해야 한다. 그러니, 이것은 살기 위한 기술이다.
헝가리 출신으로 미국의 정신의학자 토머스 사스(Thomas Szasz)는 멍청한 사람은 이것을 하지도 잊어버리지도 않으며, 순진한 사람은 이것을 하고 잊어버리며, 현명한 사람은 이것을 하되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했다.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여전히 상처를 안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저절로 기억이 나기도 하고, 잊어버릴 수 없기도 하겠지만, 억울하고 화가 나서 자신의 삶을 불 지르는 피해자 역할을 그만두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오로지 이것을 통해서만 성숙해질 수 있다. 이것은 영혼이 자라나는 선명한 소리를 느끼는 유일한 비결이기도 하다.
* 호모 룩스(HOMO LUX)는 빛으로서의 인간을 일컫습니다. 라틴어로 인간이라는 ‘호모(HOMO)’와 빛인 ‘룩스(LUX)’가 결합한 단어입니다.
* ‘호모룩스 이야기’는 치유와 결합한 시사와 심리, 예술과 문화, 에세이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