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의 노래 ‘Underwater’의 치유 비평-
마음의 빛을 찾아서
-미카의 노래 ‘Underwater’의 치유 비평-
시아
하나, 물
이것은 물 이야기다. 그렇다고 물부터 나오지 않는다. 갑자기 등장하는 것은 핏빛으로 물든 하늘이다. 우리가 남겨두고 온 세상이 서서히 무너져내리고 있는 것을 본다. 그건 어디일까? ‘우리가 남겨두고 온 세상’이라니. 3차원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과거다. 잊히지 않는 기억이라고 칭해도 좋을 것이다.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하는 추억은 적극적인 기억 더듬기이다. 추억은 대부분 긍정적이다. 더듬을수록 말랑하고 촉촉한 가슴을 느낄 수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불쑥거리며 나타나는 기억이 문제다. 그 기억은 불러내지도 않는데 별안간 튀어나온다. 오랫동안 밀봉한 채 두어도 소용없다. 어느 순간을 낚아챈 기억은 잽싸게 미끼를 물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 ‘미끼’는 자신이다. 깊게 홈이 파진 삶의 궤적들이 기필코 달려드는 형국이다. 제발이지 그 기억만큼은 하지 않기를 바라며 숨겨둔 것들이 일순 터지고 만다. 이성은 기억에 관해 금지 명령을 내리지만, 무의식은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그런 기억이라면 두 손 두발 다 들고 항복할 뿐이다. 제압할 수 없는 기억의 소용돌이는 맵차다.
노래는 계속된다. 그런 가운데 부디 냉정을 잃지 말라고 권한다. 한번 사라지면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기억을 낳는 시간을 말한다. 누구나 현재를 살아간다. 현재,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면서 과거에 머무는 것은 어리석다. 그런데도 자주 기억 속에 빠지곤 한다. 내가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나를 낚기 때문이다. 한동안 잠잠하던 기억이 요동을 치는 까닭이 있다. 살아오면서 겪는 자극들이 아우성칠 정도로 부풀어 올라서이다. 너무 과해서 넘쳐 흐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하자면, 과잉자극된 스트레스로 인해서다. 어느 정도 조절이 가능하다면, 그럴 리가 없다. 스트레스는 유익한 점도 있어서 적당한 긴장은 삶을 팽팽하게 조여준다. 잘 조율된 현이라면, 삶의 연주는 아름다울 수 있다. 그게 잘되지 않을 때, 감당할 수 없는 위기를 느끼게 된다. ‘남겨두고 온 세상이 서서히 무너져 내린다’는 것은 과한 스트레스가 일상을 잠식하고 있다는 뜻일 수 있다. 그럴 때 부정적인 온갖 기억들이 튀어나오게 된다. 기억이 불러오는 온갖 감정에 휩싸여서 괴로워하게 된다. 수치감, 모멸감, 우둔함, 나태함, 증오감 등등을 안은 부정 기억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다. 그곳에서 어떻게 도망쳐 나올 것인가?
기억을 안 하면 된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어디 발버둥 친다고 가버릴 기억인가? 억눌러왔다면, 그렇게 억압한 것보다 더 튀어나온다. 그 무지막지한 감정을 동반한 기억들, 살아온 세상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대책 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고만 치부할 게 아니다. 애초에 그 기억을 불러온 존재를 상기해보자. 미끼를 던진 것은 기억이었나, 나였나?
기억은 미끼를 문 것에 불과했다. 미끼는 던진 것은 당연히 나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애썼던 의식을 뚫고 함부로 튀어나온 것이 바로 무의식이었다. 무의식은 제압당할 수가 없다. 의식적으로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니, 무의식의 출몰은 ‘어쩔 수 없는’ 영역이다. 그렇지만 무의식은 다스릴 수 있다. 인간은 그럴만한 능력을 타고났다. 그게 바로 ‘냉정’이다. 냉정은 생각이나 행동이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침착하고 초연한 것을 일컫는다. 잡다한 부정적 기억들이 나를 죽이려고 튀어나오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하나는 다시 짚고 넘어가자. 지금, 이 순간, 현재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어떻게 살아가든 정해진 것은 없지만, 어쨌거나 내 삶을 책임지는 것은 나 자신이다. 기억에 휘둘리지 않을 해법은 스트레스를 다스리는 데 있다.
노래는 계속된다. 내가 나를 발가벗긴다. 바닥까지 떨어뜨린다. 이미 모든 것은 엉망이 되어 버린다. 처참하기 그지없다. 당신만이 나를 구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파서 뒹굴고 있는 나를 버려두고 가버린다. 혹은 가버렸다고 생각한다. 참 대단한 당신!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이라고 부를만한 누군가는 과연 누구인가? 제각각 다 다를 것이다. 대부분은 ‘사랑하는 이’를 떠올릴 것이다. 사랑을 남발하는 이 시대는 오히려 사랑이 궁핍하다. 고달픈 만큼 사랑을 외치지만, 사랑할 힘도 사랑을 줄 힘도 턱없이 부족하다. 나 혼자 지탱하기에도 버거운 삶이다. 지극한 사랑의 존재인 ‘신’을 떠올려보면 어떤가. 신조차 나를 버린 것 같은 날이 있다. 신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을 거라는 참담한 날이 있다. 참 대단한 신!
그렇지만 갈구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다만 신의 사랑이다(혹은 인간의 사랑이다). 사랑의 입맞춤만 있다면, 그래도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다. 엉망이 된 내가 그래도 버틸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런데도 신은 어디에도 없다. 애초에 신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다. 신과 함께 했던 순간을 부정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지금은 아니다. 나를 내버려 두고 가버렸다. 나는 팽개치고 버려졌다. 나는 철저하게 무너졌다. 내가 원한 건 오직 사랑뿐이었다. 이 환경을 거둬달라는 외침이 아니었다.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을 휘두르는 것도 아니었다. 과거의 소용돌이, 그 부정의 삶을 맴도는 삶에서 살아남는 법은 오직 하나였다. 아직도 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그 사랑 속에 머무를 수만 있다면, 나는 숨 쉴 수 있을 것이다. 아주 깊은 물속에서라도! 영혼의 아가미로 숨 쉴 수 있을 것이다.
물은 출몰하는 무의식의 상징이다.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황당하고 황망한, 광대한 기억의 저장소다. 한번 빠져들면 잘 헤어나올 수도 없다. 무의식에 이끌려서 내 삶이, 내가 사는 삶이 아닌 것이 된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의식의 장, 그 물속에서도 하늘 기운을 받을 수 있다. 무너져내리는 하늘이 아니라 맑고 푸른 하늘이다. 그 하늘에서 어린 나, 과거의 나는 날개를 달고 날고 있다. 당신의 사랑이어야만 가능한 이야기다.
물속에서 하늘을 나는 것은 무엇인가? 분석심리학자 프로이트가 밝힌 바로는 무의식은 성과 공격으로 들끓고 있다. 어마어마한 용광로 안에서 꿈틀대고 있는 것이 바로 욕망의 집합체인 리비도(libido)다. 삶의 동력이 되어 성장하고 발달하게 되지만, 동시에 삶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리비도를 충족하지 않으면 정신적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프로이드식으로 보자면, 물속은 물속일 뿐이다. 물속에서 하늘을 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 한때 프로이드와 손을 잡았지만, 결별하고 새로운 영역인 분석심리학을 창시한 융이 있다. 융에 의하면, 물속에서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무의식이 성과 공격만으로 들이찬 것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무의식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마음의 핵심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까 의식의 깊은 곳, 무의식의 핵심은 ‘자기(Self)’이며, 자기는 홀로 존재하지 않으며 우주의 에너지, 즉 신과 합일을 이룬다고 했다. 이런 개념은 3차원의 시각에서 보자면, 터무니없다. 그렇지만 온 세상이 3차원만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더 터무니없다. 초끈 이론에 근거해서 현대의 과학자들은 11차원까지 해석해놓았기 때문이다. 무의식이든 의식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을 얘기하고 있으니, 좀 더 보이지 않는 차원을 말한다고 해서 이상할 리가 없다. 사랑도 그러하다. 궁극적인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존재한다. 과한 스트레스가 작용하게 되면 튀어나오는 위험한 무의식은 ‘사랑’으로 잠재울 수 있다. 삶의 고삐를 잡고 함부로 휘두르는 것이 무의식인 듯하지만, 아니다. 무의식의 난동을 다스리는 것은 무의식의 핵심에 존재하는 ‘자기’이다. 통합 예술·문화 치유인 심상 시치료식으로 말하자면, ‘빛’이다. 이 빛은 세상에 태어난 인간 모두에게 존재한다. 빛을 가진 인간이라는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호모 룩스(Homo Lux)’다. 호모룩스는 인간이라는 라틴어 학명 ‘호모’와 빛이라는 라틴어 ‘룩스’가 만나서 이뤄진 말이다.
누구나 비루한 과거 속에 빠져서 과거의 행적을 되풀이하며 살기 마련이다. ‘사랑’이 없을 때는 그 정도가 치명적이다. ‘호모 룩스’로서의 인간을 사유하면, 사랑이 없을 때란 없다. 사랑이 없다고 착각할 때만 있을 뿐이다. 인간이 태어난 것이 우연의 결과라면, 사는 것도 우연일 것이다. 이 우주도 우연히 생겨난 것이고 우연히 죽는 것일 텐데, 그것은 무의미의 전개 방식이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면, 살 이유조차 없을 것이다. 니힐리즘의 사고방식으로 보자면, 모든 것이 가치가 없다고 귀결되겠지만, 그런 이들조차도 궁극에는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우주와 잇닿아 있다는 기막힌 사실을!
사랑의 명백한 의미가 적힌 성경,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3차원에서 4차원 이상을 짐작하는 것은 요원하다. 감히 짐작만 할 뿐이나, 사실 그 짐작조차 어렴풋할 뿐이다. 신의 사랑을 인간이 어떻게 짐작할 수 있을까? 그 뜻을 어떻게 다 알아차릴 수 있을까? 신이 어디 있냐고 큰소리치거나, 여차하면 있다고 믿던 신조차 구겨서 버리기까지 한다. 그러니, 인간이 신의 사랑을 모두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신은 놀랍게도 신의 속성을 닮은 인간을 창조했다. 이 사실을 부인하고 싶겠지만, 그렇더라도 잊지 말자. 지금 우리는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미카(Mika)의 노래 ‘Underwater’를 들여다보는 중이다. 이 노래 가사에 의하자면, 사랑과 접속하고 있는 한 나는 물속에서도 하늘을 날 수 있다. 무의식의 중심에 존재하는 우주의 에너지, 신과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부정적 기운이 완연한 과거를 직면하는 것은 어렵다. 단순히 어렵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누구나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한다. 회피만이 정답이라고 착각하기 일쑤다. 현자들이 한결같이 지금, 현재, 이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좋지 않은 과거를 무엇 때문에 생각한단 말인가. 그렇게 과거를 돌아볼 시간에 지금 하는 일에 충실하면 된다며, 합리적인 논리를 펴기도 한다. 과거를 싹둑 잘라내어 버리면 잘 사는 것만 같다. 과거를 떠올리며 회한에 겨워하면 잘못 사는 것처럼 여긴다. 그런데도 그렇지 않다.
과거는 버린다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버려야 한다고 우격다짐할수록 과거는 무의식 속 동굴 안에 안전하게 숨어있다. 그야말로 과거는 줄어들지도 않고 무탈하게 보존되어 있다. 세월을 거듭하면서 그 부피가 더 커질 수도 있다. 겉으로는 그깟 기억쯤 잊어버렸다고 큰소리치거나 올라오려는 기억을 차버려서 쫓아낸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 기억들은 과도한 스트레스가 작용하면, 아주 잘 튀어 오르게 된다. 그럴 때, 노래 가사처럼 ‘곤욕을 치르게 된다’. 그런 고난이 올 때, 더욱 간절하게 사랑을 갈구하게 된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오로지 신만이 나를 살게 할 수 있다. 어떤 세상에서라도 신의 사랑만이 나를 살아가게 할 것이다.
신은 우주 저 멀리, 바깥에 있지 않다. 신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한다. 소리높여 외친다고 신이 듣는 것이 아니다. 이미 영혼의 중심에 함께 존재하는 신을 느낄 수 있다. 신은 단 한 번도 떠난 적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다만, 내가 스스로 신을 외면하고 가려온 것이다. 그것은 보이는 눈을 감고, 보이지 않는 눈을 떠야지만 알 수 있다. 이 놀라운 알아차림은 이렇게 전해져온다. 진흙탕 속에서 우뚝 솟아올라 세밀한 주름을 머금고 있는 연꽃. 아무것도 품에 가두지 않고 훌훌 털어버리는 새들의 날갯짓. 천둥과 번개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영글어가는 열매들. 아무런 탓도 하지 않고 묵묵히 위로도 아래로도 뻗어가는 나무. 아래로만 흘러가며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고 경계를 허무는 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기꺼이 떨어지는 나뭇잎과 꽃송이. 아무것에도 걸리지 않고 어디든 갈 수 있는 바람.
어느 순간에 알아차림은 자연스럽고 은밀하게 찾아온다. 고통을 겪으면서 오는 깨달음으로, 원하지 않는 것을 참아내면서 오는 지혜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을 품어주는 자비로, 불안해서 나풀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평화로, 전전긍긍한 마음을 응원하는 격려로.
이미, 잉태된 순간부터 존재해온 신의 사랑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 영혼이 존재하듯이 영혼의 심지에 신이 임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을 부인하는 이들한테조차 그러하다. 그러니, 내면에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은 곧 신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 기억이야말로 최상의 추억이자 최고의 기억일 것이다. 그럴 때, 노래의 마지막 구절처럼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당신의 사랑’이 될 수 있다.
우리말로 번역한 미카의 노래 ‘Underwater’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다.
갑자기 핏빛으로 물든 하늘
서서히 무너져내리는, 우리가 남겨두고 온 세상
부디 냉정을 잃지 말아요
한번 사라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니
내가 날 다 발가벗겨, 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이미 모든 게 엉망이어도
당신만이 날 구해줄 수 있었는데
그저 아파하는 날, 버려두고 가네요
이제 알겠어요, 당신 참 대단하네요
내가 원한 건 당신의 사랑, 단지 그 뿐이었거든요
내게 입맞춤해줄래요
그럼 물 속에서도,
저 깊은 물속에서도, 난 숨 쉴 수 있을텐데
...
맑게 갠 푸른 하늘을 날아다녀요
내가 버리고 온 세상의 아이는, 그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죠
충분히 좌절했어요
사라지면, 다시 볼 수 없을 것도 알죠
나 자신을 드러낸 댓가가, 날 이렇게 곤욕을 주고 있네요
모든 게 너무 엉망진창이어도
당신만이 나를 구할 수 있었는데
그냥 날 두고 떠나갔지요
이제 알겠어요, 당신 참 놀라운 사람이란걸
내게 필요한 건 당신 사랑, 뿐이었는데
그럼 난 수면 아래서도, 그보다 더 한 세상에서라도
그 어떤 세상이더라도
...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나를 살게 하는, 당신의 사랑만 있다면
...
우릴 살게 하는, 당신의 사랑만 있다면
우린 그 어떤 세상에서도 살 수 있어요
둘, 심상 시치료 기법으로서 ‘Underwater’
이 노래를 심상 시치료 기법으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순서대로 접근하면 된다.
(1) 순서
① 미카의 ‘Underwater’ 노래를 감상한다. 눈을 뜬 채로도, 감은 채로도 좋다. 엎드리거나 앉거나 자유로운 자세로 편안하게 감상한다.
② ①을 한 다음, 느낌을 자유롭게 나눈다.
③ ①의 노래 가사를 우리 말로 번역한 가사를 함께 읽는다.
④ 진행자(치료사)는 내담자가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안내한다. 위에 서술한 치유 비평을 내면화하여, 자각한 내용대로 인도하고 나서 내담자의 느낌을 자유롭게 나눈다.
⑤ 다음 심상 시치료 멘트대로 행한다(‘...’표시는 10초 정도 뜸을 들이라는 표시임).
(눈을 감고 간단한 복식호흡과 이완을 한 후 진행한다)
지금 나는 물속에 있습니다. 물속에 깊이 잠겨있는 나를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물속은 어떤 느낌이 드는지, 물의 분위기가 어떤지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 지금 나는 물속에서도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오르듯이 헤엄칠 수 있습니다. 아주 유연하고 자유롭게 물속을 가르며 날개를 펴는 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 지금, 나는 물속에서 마음껏 자유를 즐기고 있습니다. 나는 편안하고 싱그럽고 환합니다. 이 느낌을 고스란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 내가 이렇게 편안하고 싱그럽고 환한 이유는 내 안의 중심에 신, 혹은 우주의 에너지가 존재하고 있어서입니다. 이 사실을 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감사합니다’를 속으로 말하면서 이 사실을 그대로 받아 들여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를 속으로 3번 반복합니다. ... ... 지금, 나는 하늘의 기운을 받은 채 물속에서 감사하면서 자유롭게 날아오르고 있습니다. 현재, 지금, 이 순간의 느낌을 오롯이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 ... 이제 세 번을 세면, 이 느낌을 그대로 간직한 채 눈을 뜨시면 됩니다. 세 번을 세겠습니다. 하나, 둘, 셋!
⑥ 심상 시치료 멘트대로 행하고 나서 느낀 점을 적는다. 물의 분위기, 물속에서 날아오른 경험, 신이나 우주의 에너지한테 ‘감사합니다’라고 한 다음의 느낌을 적으면 된다. 혹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면, 눈을 뜬 채 멘트의 순서대로 장면을 상상해서 적는다.
⑦ ⑥의 글을 충분히 나눈다(개인치료일 때는 치료사, 집단치료일 때는 집단원과 함께 나눈다).
** 치유 효과
물은 무의식의 장이자 현실 세계의 장을 상징한다. 물은 살아가는 터전이지만, 동시에 기억 속에 잠식해서 과거를 되풀이하며 벗어날 수 없도록 하는 숨 막히는 곳이기도 하다. 모든 부정적 기억이 출몰하는 가운데 내면의 중심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주의 에너지, 신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럴 때 충만한 하늘의 기운을 가진 채 물속을 잘 견뎌낼 수 있다. 실천적인 방법은 바로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는 것이다. ‘감사’에는 섭리에 내맡기는 힘, 어쩔 수 없는 것을 이겨내는 큰 힘이 내재 되어 있다. 이 기법은 심상 시치료의 치료에 대한 과정 중 ‘깊은 내면’ 단계에 적합하다.
* 계간지 <미래시학> 2024년 가을 제50호 [특별기획시리즈] 수록. 전문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