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 보기
시아
어김없이 마지막 달이 되었다. 한 해를 돌이켜 보면 모래알 같기만 하다. 손안에 쥐는 것은 죄다 흩어져 내린다. 추억은 소중하지만 가뭇없다. 또 이렇게 한 해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인가!
18세기에 활약한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순수의 전조’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보고 / 들판에 핀 한 송이 꽃에서 천국을 본다 / 그대의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 / 찰나의 시간 속에서 영원을 보라” 이 시의 다음 구절은 이러하다.
“인간은 기쁨과 비탄을 위해 태어났으며 / 우리가 이것을 올바르게 알 때, / 우리는 세상을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다 / 기쁨과 비탄은 훌륭하게 직조되어 / 신성한 영혼에게는 안성맞춤의 옷”
희로애락이 골고루 섞여 있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 세상을 잘 살아나갈 수 있다. 고결하고 거룩한 신의 속성을 가진 ‘영혼’에게는 그것이 딱 맞아떨어지는 옷이다. 게다가 블레이크는 “아름다움이 충만하고 진실한 혼은 더러워지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탄생의 순간에 주어지는 순수와 거리가 있다. 그런 순수는 갓 내린 눈밭과도 같다. 햇발이 내려앉아서 녹여지거나 누군가 지나가고 나면 순식간에 더러워진다. 태어나는 순간에 가졌던 순수는 변하기 마련이다. 무수한 인간관계와 마주한 상황에 의해 상처를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순수는 사라지는 듯하지만, 실상은 깊은 곳으로 숨어든다.
한번 숨어든 순수를 불러내기란 쉽지 않다. 그 과정이 지난해서 쉽게 포기하며 살기도 한다. 고난 극복을 위한 각고의 정성이 이뤄질 때, 그러한 순수는 깨어난다. 이 놀라운 부활은 영혼의 때를 벗기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재탄생된 순수는 결코 빛바래지 않는다. 20세기 이탈리아 소설가 알베르토 모라비아는 “모든 것을 알고 난 뒤에 오는 순수는 결코 더럽히지 않는다.”라고 했다.
태초의 순수로 머물 수 없는 삶이 슬픈 것이 아니라, 더할 나위 없는 순수가 될 수 있는 삶이 아름답다. 인간에게 그런 가능성이 주어져 있다. 매 순간 순수의 문이 열려있다. 20세기 미국의 시인인 에드워드 에스틀린 커밍스는 “존재할 수 있거든, 단지 존재하라. 만일 그럴 수 없다면, 원기를 내서 다른 사람들의 일에 끼어들면서 스스로 지쳐 쓰러질 때까지 이런저런 일을 참견하면서 계속 그렇게 살아가라.”고 했다. 가능성의 문을 닫는 데 전력을 쏟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자명하다. 그것을 ‘순수의 전조’에서 블레이크는 이렇게 노래했다. “열정 속에 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 열정이 그대 속에 있는 것은 좋지 않다”
‘나’라는 존재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궁극에는 어디에 가 있을지 알아차리는 것은 선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본증묘수(本證妙修)’다. 본래의 깨달음으로 삶을 살아나가는 것 자체가 영묘한 수행의 과정이다. ‘나’를 우주의 에너지, 혹은 신과 하나로 인식하는 합일의식이 일어난다면,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그럴 때 열정에 휩싸이는 것이 아니라 열정 안에서 한껏 뛰어놀 수 있다. 나를 온전히 이끌고 가는 신의 불꽃 같은 눈동자를 떠올려본다. 그런 마음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려 한다.
* 호모 룩스(HOMO LUX)는 빛으로서의 인간을 일컫습니다. 라틴어로 인간이라는 ‘호모(HOMO)’와 빛인 ‘룩스(LUX)’가 결합한 단어입니다.
* ‘호모룩스 이야기’는 치유와 결합한 시사와 심리, 예술과 문화에 대한 에세이입니다.
******* 위 글은 2024년 12월 2일자 <뉴스 아이즈> 칼럼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