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지구력이 달려서 영화나 드라마가 여간 재밌지 않고는 끝까지 정주행 할 수가 없다. 한때는 시즌 다섯 개 정도는 쪽잠 자 가면서 라면 먹어 가면서 단숨에 완료했던 나였는데. 시간 날 때 한 편씩, 한 시간씩, 보약을 먹듯이 꾸준히 보는 건 정주행이 아니다. 최근 진정한 정주행을 했던 건 넷플릭스 ‘셀레브리티’하고 웨이브 ‘박하경 여행기’가 전부였던 것 같다.
여기에 더해 영화나 드라마 안에 등장하는 소재가 궁금해서 가 보고,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이건 나한테 대박 콘텐츠에 해당한다. 백투더퓨처를 본 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일렉 기타를 치고 싶다든지,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고 나서 학교 운동장을 달리고 목욕탕을 들렀다가 귤을 까먹고 싶다든지, 첨밀밀이나 비포선라이즈에 나오는 홍콩이나 비엔나에 가 보고 싶다든지, 봄날은 간다처럼 같이 라면을 먹고 싶다든지 (누구랑?) 말이다.
‘박하경 여행기’를 이틀 만에 정주행 하고 혼자 여행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건 이 드라마가 나에게는 꽤나 성공한 콘텐츠라는 말이 된다.
고등학교 국어 선생인 박하경은 토요일에 당일치기 여행을 혼자 갔다 오는 게 취미다. 취미라기보다는 시간을 때우는 방식이다. 사람이라는 게 그렇다. 여행을 가고 싶지만 길게 가기는 싫을 때가 있다. 어디로 떠나고 싶지만 또 침대에서 삐대고 싶기도 하다. 열정적으로 일하고 싶지만 또 피곤한 건 질색이다. 애인을 사귀고 싶지만 감정싸움은 신물이 난다. 그런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 누구나 느끼는 내 안의 박하경에 대한 이야기다.
박하경은 당일치기 여행을 다니면서 평범한 사람들을 만나고 소소한 사건을 겪는다. 30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드라마는 그 소소한 사건을 담백하게 따라간다. 에피소드마다 편차는 있지만 나쁜 에피소드도 중간은 한다. 마라 소스 같은 강한 자극이 익숙한 요즘 슴슴한 평양냉면 같은 보기 드문 드라마이기도 하다. 물론 인테리어는 꽤나 모던하다.
자칫 관광지 홍보 영상이 될 수도 있는 드라마는 우리가 평소에 잊고 있거나, 꼭 붙들고 싸우고 있는 예민한 문제들을 적절하게 (혹은 절묘하게) 녹여 넣었다. 상처. 그리움. 소통. 꿈. 책임. 인연. 그리고 나. 이 모든 이야기들을 감각적이지만 너무 무겁거나 깊지 않게, 일상적이지만 그렇다고 상투적이지 않게, 익숙하지만 뻔하지 않게 슬쩍 다루고 빠진다. 얄팍하지만 영리하고, 통속적이지만 세련됐다. 이 정도 감각은 흔하지 않다.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지만 일종의 사건을 겪으면서 박하경은 미세하게 진동했다가 언제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박하경이 여행에서 무얼 얻었는지, 무엇이 변화했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드라마는 그렇게 극적이지 않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절절한 느낌을 준다.
가장 놀라운 건 이나영이다. 이나영을 처음 본 게 언제였을까. 맥심이었나, 엘지냉장고였나, 아니면 유니클로였나. 분명 광고에서는 계속 봤을 거다. 드라마는 당연히 ‘내 멋대로 해라’에서였을 거고, 영화는 ‘아는 여자’였다. 아니영은 비현실적인 비율을 가지고 있고, 만화 캐릭터 같이 큰 눈을 껌뻑껌뻑거리면서 말도 안 되는 말을 중얼중얼 거리는 약간 독특한 배우였다. 광고에서는 너무나도 상큼한 표정을 편안하게 지을 수 있는 모델이었다. 그런데 그 큰 눈이 이 드라마에서는 슬퍼 보였다.
여전히 아름다운 외모지만 적당히 나이가 보이는 표정은 자연스러웠고, 장난기 넘치지만 약간 억누르는 듯한 묘한 톤과, 쓸쓸하고 서늘한 톤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코미디 연기를 무척 좋아하는데, 구체관절인형 같은 어색한 몸짓과 언뜻 무심하지만 장난기가 흐르는 이나영의 표정은 코미디 연기에 딱이다. 나이가 들면서 연기가 늘었나? 아니다. 자세히 기억을 하지 못해서 그렇지 아는 여자에서 이나영의 연기를 나는 꽤나 좋아했었다.
좋은 배우들이 좋은 스토리 속에서 연기를 하는 걸 보면 잠시 행복한 느낌이 든다. 박하경 여행기.
조연 배우들도 대부분 훌륭하지만 심은경이 나왔을 때는 깜짝 놀랐다. 뚱하고 냉소적인 이나영과 성격이 완전히 다른 고등학교 친구로 등장하는 심은경의 연기을 보면서 내내 탄식을 멈추지 못했다. 디테일한 정보가 전혀 없는 보조 캐릭터는 과장되고 단선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심은경이 연기한 친구는 이나영 보다 더 신비롭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보였다. 밝지만 어둡고, 즐겁지만 쓸쓸한 사람.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 그걸 표현하는 게 어려울 뿐이다.
이나영과 심은경은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만난다. 별다른 액션 없이 둘이 나란히 앉아 대화를 주고받는 두 개의 씬은 이 드라마 최고의 장면들이다. 10여 년 만에 만난 두 친구는 감정을 폭발하지 않고 담담하게 서로의 그리움에 대해 얘기한다. 큰 갈등 관계가 아닌데도 둘의 대화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터질 것 같은 공기, 기묘한 기류, 도무지 알 수 없는 사연. 특히 이나영이 이야기할 때 심은경의 리액션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자연스러운데 관객이 기대하는 걸 많이도 아니고 살짝살짝 피해가는 절묘한 기술. 아니 기술이 아니라 마술이 아닐까. 이나영도 마찬가지다. 심은경이 갑자기 사라지자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뜨는 이나영의 표정은 백 마디 말보다 더 많은 걸 전달했다. 둘의 대화가 끝나고 나는 내내 참았던 숨을 뱉어냈다.
하나 덧붙이자면. 이나영의 동료 미술 교사로 나오는 조현철의 연기는 신기했다. 지극히 일상적인 어투로 중얼중얼거리는 연기는 우리 주변에 어딘가 꼭 있는 캐릭터이다. 어디서 봤더라. 아 맞다. D.P.에서 병장한테 두들겨 맞는 일병. 축구 잘하는 애가 야구도 잘한다. 연기는 노력도 중요하겠지만 감각은 어쩔 수 없이 타고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