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만나자고 한 건 내가 아니라 H였다. 헤어진 게 작년 봄이었으니까 일 년 하고도 다시 반년이 지났다. 아직도 같이 갔던 스타벅스만 봐도 가슴이 아리다. 서울에는 정말 스타벅스가 많다. 하루에 3.5회 정도는 가슴이 아리다고 보면 된다. 물론 작년처럼 매일 밤 생각나지는 않는다. 이제 술을 마셔도 잘 울지 않는다. 그냥 집에 돌아가는 골목에서 문득 쓸쓸해지고, 그래서 그 노래가 듣고 싶고, 그 노래를 들으면 눈에 살짝 눈물이 고이는 정도다. 넘쳐서 흐르지 않을 정도다.
일요일 밤에 카톡이 울렸다. 버거킹에서 쿠폰을 보냈으려니 보지도 않았다. 자기 전에 확인해 보고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뭐해?]
뭐 하긴 뭐 하나. 답장을 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까똑. 에구머니나.
[안자?]
프로필을 확인했다. 남편과 아마 일본 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 행복해 보였다. 젠장.
[오랜만이네…]
[잘 지내지?]
이렇게 시작된 카톡은 마술처럼 저녁 약속으로 이어졌다. 분명히 내가 먼저 만나자고 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친구놈들은 미친놈이라고 쌍욕을 해댔다. 걔가 널 어떻게 찼는지 벌써 잊어버렸냐. 등신도 이런 상등신이 없다. 모지리 같은 새끼. 내가 생각해도 난 모지리다. 어쩌겠나.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약자일 수밖에 없다.
꾸민 듯 안 꾸민 듯 꾸미고 나간 오늘 만남은 그야말로 아무 용건이 없었다. 영화에서처럼 모텔로 직행해서 화끈한 정사로 이어진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도장을 찍었던 황소곱창집에서 1차를 먹고 맥주가 맛있지는 않지만 가격이 착하고 그저 헤어지기 싫어서 밤을 새우던 호프에서 2차를 마셨다. 달라진 게 있다면 밤을 새우지 않고 11시에 헤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아. H는 스트레이트를 해서 스타일이 달라졌고, 나는 살이 조금 빠졌다.
결혼 생활에 대한 언급은 서로 의도적으로 피했던 것 같다. 그저 요즘 좀 우울하다는 H의 하소연. 예전과 다름없이 답답하게 살고 있는 나의 푸념. 이제는 추억이 된 일들을 얘기하면서 잠시 웃었을 뿐이다.
H의 신혼집은 마곡이었다. 여의도역까지 같이 걸어갔다. 이제 집에까지 바래다 줄 필요는 없어졌다. 계단에서 인사를 했다.
[나는 버스 타고 가려고.]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카톡이 울렸다.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조심히 들어가라는 말일 거다.
오늘따라 버스가 오지 않았다. 지도앱에서 10분이면 온다고 했다가, 다시 12분, 14분으로 늘어졌다. 사고라도 났나. 택시를 타려고 했더니 경쟁자가 너무 많았다. 카카오택시를 불렀다. 아무도 나의 콜에 응답을 하지 않았다. 젠장.
2차 호프집에서 화장실을 가지 않고 나온 게 패착이었다. 갑자기 오줌이 마려웠다. 상가 화장실을 찾아 미로 같은 복도를 걸어갔다. 일부러 화장실을 찾지 못하도록 설계를 한 게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택시를 한 번만 더 부르자. 볼일을 보고 한결 여유로운 마음으로 미로를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상가 정문을 나가려는 순간.
한 남자가 길에서 상가 정문 앞을 지나다 갑자기 고꾸라졌다. 내 코 앞에서 벌어진 상황이었다. 술에 많이 취한 것 같았다. 남자는 오른쪽 뺨을 보도블록에 비비고 있었다. 팔은 가슴에 눌려 가누지 못했다. 흡사 뒤집어진 굼벵이 같았다.
큰길을 오가는 그 수많은 사람들. 아무도 그 남자를 도와주지 않았다. 술 취한 사람 함부로 도와주다가 오히려 낭패를 봤다는 얘기를 나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그건 보통 여성 취객일 경우인데… 하긴 요즘 남녀가 따로 있나. 나도 외면할까. 하필 왜 내 코 앞에서. 나는 바닥에 가까이 다가가서 말을 붙였다.
“괜찮으세요?”
남자는 눈을 뜬 채 웅얼웅얼거렸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119라도 불러드릴까요?”
119를 부를 상태는 아니었다. 나는 포기하고 남자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생각보다 말짱했다.
“괜찮으신 것 같네요. 조심히 가세요.”
이놈에 카카오 택시는 왜 안 잡히는 걸까. 이 세상에 택시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졌는데 나만 모르고 애타게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누가 뒤에서 어깨를 콕콕 찔렀다. 아이고. 에그머니나.
“저기요. 아까 인사도 제대로 못한 것 같아서요. 아깐 감사했습니다.”
혀가 살짝 풀렸지만 만취 상태는 아니었다. 삼십 대 초반. 와이셔츠에 양복바지. 구두. 재킷이 없다. 날씨도 쌀쌀한데. 아마 어디 놓고 왔을 것 같다.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네네.”
취객은 빨리 보내는 게 상책이다. 반대 방향으로 좀 걸어가서 계속 앱을 들여다봤다. 그냥 혼자 술이나 한잔 더 할까. 저기요. 아이고. 에그머니나.
“저기. 오해는 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제가 오늘 꼭 술을 마셔야 할 일이 있었거든요. 근데 지금 지갑도 옷도 다 잃어버렸어요. 혹시 가능하시면 술 한잔 사주실 수 있으세요? 부담스러우시면 거절하셔도...”
남자는 어깨를 떨구고 고개도 떨구고 말끝을 흐렸다. 뭐지 이 남자는. 분명히 사연은 있는 것 같다. 뭘까. 여자? 코인? 주식? 직장 내 갈등? 내가 명색이 글을 쓰(려고 하)는 사람 아닌가.
“음… 그럼 조건이 있어요. 딱 한 시간만. 그리고 딱 소주 한 병. 어때요?”
그렇게 남자와 나는 작은 이자카야에 들어갔다. 지금 생각해 보니 무슨 안주를 시켰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소주를 한 병 시켰다는 건 확실하다.
내 예상이 맞았다. 남자는 최근에 투자를 했고, 결국 빚까지 내서 돈을 넣었고 모두 날렸다고 했다. 거의 전세금과 맞먹는 돈이고 와이프한테 말해서 집을 빼야 하는데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없다. 사연은 낙엽만큼이나 벚꽃잎만큼이나 많다고 하지 않나. 위로를 해줄 자격은 없었다. 그저 소주를 따라서 잔을 부딪혀줬다. 그렇게 두세 잔을 마셨던 것 같다.
“이렇게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잔 하시죠.”
그렇게 다시 건배를 하는데 뭔가 살짝, 아주 살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 남자의 약지쯤이 내 엄지를 살짝 건드렸다. 응? 뭐지? 일부러 하지 않으면 닿을 수가 없는 건데? 다음 잔을 건배하면서 명확하게 알았다.
“저기. 선생님.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남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멍하게 나를 봤다.
“혹시 선생님이 저를… 아…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저기 혹시 선생님… 아이고… 그냥 말씀드릴게요. 혹시 선생님 게이 선생님이신가요?”
게이 선생님은 뭘까. 남자는 너무너무 강하게 부인했다. 절대 아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생각을 했냐. 난 아니다. 하지만 괜찮다. 그러면서 술을 한 병 더 시키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물론 두 명에 소주 한 병은 비인도적이다. 하지만 더 이상 마시면 안 된다고 나의 촉이 고성을 지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남자는 실망한 표정으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내가 오해를 했나. 상당히 미안한데. 에이. 어쩔 수 없지. 집에 가자. 하는 찰나 남자가 화장실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갑자기 내 앞이 아니라 옆에 털썩 앉았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아니 선생님. 그만 가시죠. 저 계산하고 가겠습니다.”
남자는 멍하게 나를 계속 바라봤다. 아니… 저기… 도로에 넘어졌을 때와 비슷한 소리를 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가게를 나오면서 슬쩍 훔쳐봤다. 남자는 자리에 앉아 남은 소주를 쓸쓸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밖에서 택시를 기다리는데 남자가 가게에서 나왔다. 나를 향해 걸어왔다. 꾸벅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어딘가로 사라졌다. 오해였을까.
아침에 늦잠을 잤다. 카톡과 문자가 수십 개가 와 있었다. 어젯밤에 확인하지 않은 H의 문자 네 개를 제외하면 대부분 스팸이었다.
11:06pm [버스 안 탔으면 술 한잔 더 할래?]
11:34pm [카톡 안 보네]
11:42pm [알았어 들어갈게]
11:42pm [잘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