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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균 Apr 08. 2023

아저씨, 돈 좀 써보셨어요?

자신에겐 너무 인색한 당신에게

돈. 좋아합니다. 중학교 시절 부모님이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돈을 엄청 많이 벌어서 가격표를 안 보고 쇼핑하는 일상이 꿈이라고 말할 정도로 돈을 좋아했습니다. 아마 중학교 때 새롭게 교복을 맞춰 입은 누나와 달리 저보다 키가 10cm나 컸던 이름도 모르는 동네 형한테서 신형 엘리트 교복과 안감부터 다른 옛날 교복을 물려 입은 게 어린 마음에 상처가 꽤 컸던 것인지, 그때부터 돈에 눈을 뜬 거 같습니다. 집이 못 사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꽤 고가의 물건을 원한다고 바로바로 살 수 있을 정도로 잘 사는 건 아니었기에 학창 시절을 생각해 보면 뭔가 엄청 갖고 싶어서 돈을 모으거나 부모님을 보채서 샀던 적은 없었던 거 같습니다. 옷이나 신발 등 뭔가를 특별히 좋아했다기보단 돈 그 자체를 좋아했다 말할 수 있겠군요.

그러다 보니 돈을 쓰는 법을 잘 몰랐습니다. 멜론 이용권을 구매하기보단 유튜브 불법 음원 추출을 통해 직사각형 아이팟에 노래를 모았고 악보를 구매하기보단 유튜브에 나온 악보를 한 땀 한 땀 캡처해 마디마다 크기가 제각각인 악보를 만들 정도로 돈을 잘 안 썼습니다. 당시 한 달 용돈이 5만 원인 것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대학생이 돼서도 크게 소비 양상이 달라지지 않았던 걸 보면 그냥 제가 쪼잔했던 거 같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코로나 때문에 시간이 남아돌아 듣기만 했던 음악을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에 작곡 프로그램을 알아봤지만 3만 원이면 살 수 있을 줄 알았던 제 예상과 달리 제일 싼 프로그램이 25만 원부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무료 프로그램도 있었습니다. 희미한 기억에 의하면 스튜디오 원이라는 프로그램의 무료 버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사용하기도 어렵고 복잡하여 툴툴거리며 프로그램을 닫았습니다.

그러다 고등학교 축제 때 같이 공연하게 된 친구로부터 꽤 유명한 회사의 불법 다운로드 링크를 얻어냈습니다. 그 친구도 당시 힙합에 관심이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평평한 발을 가진 탓에 그만 요양원에서 조용히 어르신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여하튼 그 친구 덕분에 무료로 꽤 많은 기능들을 익히고 사용해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법 다운로드의 한계인지, 업데이트가 몇 년 전에 멈춰 있어 유튜브에 떠도는 강의 영상들을 봐도 활용을 할 수 없었고 툭하면 갑자기 꺼지는 일이 많아 점점 클릭 횟수가 줄어갔습니다. 새 프로그램을 살까도 생각했지만 30만 원짜리 기타를 살 때도 손을 벌벌 떨며 샀던 제가 손에 잡히지 않는 무형 자산에 25만 원을 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에 수학공식 몇 개를 끄적이고 어쩌면 하루 종일 대학교 썰을 푸는 것만으로 이 돈을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의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돈을 쓸 줄 몰랐던 저는 나중에 쓸 일이 있겠거니 하며 계좌에 곤히 넣어두고 간간이 주식을 사거나 코인을 돌렸습니다. 수익이요? 경제학 전공으로서 한 말씀해 드리자면 혹시라도 누군가 자신이 경제학과임을 강조하며 믿고 투자를 해보라 권유한다면 빠른 손절을 추천드립니다. 어쨌든 당시에 충분히 살 능력과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깝단 이유로 이상한 프로그램을 뒤적거리며 시간을 보낸 게 지금 생각하면 꽤 아쉽게 느껴집니다. 시간이 많았던 그 시기에 좀 비싸더라도 정품을 사 이것저것 해보았다면 지금의 후회는 없었겠지요.

아마 과소비와 자신에 대한 투자의 차이를 잘 몰랐던 거 같습니다. 10년간 돈이라곤 친구들과 간간이 사 먹는 맘스터치와 가끔 기분을 내고 싶을 때 먹은 아마스빈의 녹차 스무디, 학년이 바뀔 때마다 집 앞 서점에서 샀던 개념원리와 수학의 정석이 다였으니 그럴 만도 하죠. 그리고 그땐 제가 변덕이 좀 심해 관심사가 자주 바뀌어 소비함으로써 얻는 만족보다 미래에 할 수도 있는 후회가 더 클 거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걱정은 좀 줄이려고 합니다. 괜히 시간 낭비하는 짓 아닐까, 돈 낭비하는 짓은 아닐까 하는 생각은 좀 뒤로 미뤄놓고 하고 싶은 걸 생각나는 대로 다 해 볼 예정입니다. 물론 아직 가격표를 안 보고 살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은 없기 때문에 약간의 가성비를 따져가며 해야겠죠.

긴 휴학의 시간으로 인해 의도치 않게 익숙했던 모든 것들로부터 단절되다 보니, 새롭게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아졌습니다. 음악을 만들고 싶고 멋진 영상과 사진, 감독이든 배우로든 영화제작에 참여해 보고 싶습니다. 작가가 되고 싶고 재밌는 광고 영상을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고 여행을 가고 싶고, 멋있는 라떼 아트를 해보고 싶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얼마나 좁은 세상에 갇혀 있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학교라는 직사각형 박스 안에만 점을 찍어왔는데 앞으로는 이곳저곳 점을 찍어볼까 합니다. 잡스 아저씨가 말한 것처럼 지금 찍은 흩어진 점들이 언젠가는 이어질 수도 있잖아요? 안 이어져도 뭐 어떱니까. 물감을 아무렇게나 뿌려도 예술이 되는 시대에서 점 하나가 예술이 되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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