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호균 Apr 04. 2023

당신의 인생이 약간은 팍팍한 이유

대화를 낯설어하는 당신에게

대화. 자주 하시나요? 저 같은 경우 굳이 안 해도 되는 대화를 시작하는 타입은 아닙니다. 엘리베이터에서 가끔 마주치는 같은 아파트 주민에게는 내릴 때 가볍게 고개를 까딱거리거나, 혼자 택시를 타면 일부로 뒷자리에 앉아 귀에 버즈를 꽂으며 '조용히 가고 싶다'라는 의사를 은근슬쩍 내비치는, 그러다 택시 기사 아저씨가 말을 걸진 않을까 하는 까닭에 귀 한쪽은 열어두는 소심함도 겸비하고 있죠.

대화를 먼저 시작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어차피 한번 보고 말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택시 기사 아저씨와 국정 정치를 아무리 논해도 택시비를 깎아주진 않고, 어색한 엘리베이터 주민하고 얘기하기보단 15초 동안 재미있는 릴스 한 편을 보는 게 훨씬 이득입니다.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 알바 시간을 바꾸고 한 잔에 만 원은 가까이 되는 커피샵을 찾아가는데 내 인생에 있어 스쳐 지나갈 사람들과는 대화할 여유도, 의지도 없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20대들이 그러지 않을까요? 이웃집 할머니나 넉살 좋은 아저씨를 제외하곤 굳이 당신에게 말을 걸지 않고, 당신도 말을 걸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심한 사회라고 할 수 있겠네요.   

여기서 잠깐 저의 짧은 미국 여행기에 관한 얘기를 늘어놔보겠습니다. 고작 일주일 다녀온 미국 여행을 또 꺼내곤 싶진 않았는데 어쩔 수가 없네요. 여행에서 느꼈던 모든 생각과 감정을 남김없이 기록하고 싶은 것이니 매 글마다 반복되는 지루한 레파토리라도 모른 척해주시기 바랍니다.

혼자 다니는 미국이 조금은 무서워 나름의 보호책으로 MIT 후드티를 입고 갔던 저는 여행 첫날부터 예상치 못한 관심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시간표와 하나도 맞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다 지쳐 털레털레 미술관을 향해 걸어가던 도중, 스케이트를 타고 빨간색 슈프림 모자를 쓰고 있던 청년 한 분이 갑자기 제 앞에 멈춰 서서는 'from Boston?'이라 물었습니다(MIT는 보스턴에 있다는 걸 이후 구글을 통해 알았습니다). 최대한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한국에서 왔고 이 티는 옛날에 기념품으로 산 거다'라고 말하니 약간은 실망한 눈치였지만 어쨌든 주먹 인사를 하고 다시 갈 길을 갔습니다. 그래도 어리숙한 관광객 티는 안 나는구나 생각하며 다시 길을 가던 찰나 가는 길목마다 5명 중 한 명은 'from Boston?'이란 질문을 수도 없이 던지길래 그때부터는 그냥 쿨하게 'Yes'라 하며 보스턴 주민을 사칭하고 다녔습니다.

두 번째 날부터는 예상치 못한 관심이 귀찮아 평범한 후드티를 입고 다녔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이 대화를 걸진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from Boston?'에서 'How's it going'으로 바뀔 뿐, 이들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인앤아웃에서 햄버거 하나를 주문할 때도, 버스 정류장에서 같은 버스를 기다릴 때도, 주차장에서 몸집이 저의 두 배만 한 경찰 아저씨를 마주칠 때도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서로 인사를 건네고 조그마한 주제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바지가 이쁘다, 날씨가 춥다부터 시작해 혼자 감자샐러드를 먹고 있는 저에게 다가와 맛있냐며, 어디서 샀냐며 자연스레 묻길래 먹고 있던 감자샐러드를 줄 뻔한 적도 있습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이후에는 좋더라고요. 그  뒤로부터 저도 그냥 편하게 눈에 띄는 사람마다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다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이런저런 시답잖은 얘기까지 이어갔습니다. 앞에 이불을 뒤집어쓴 노숙자가 지나가면 냄새난다며 같이 흉을 본 것도, 밤늦게 찾아간 푸드트럭에서 음식을 잘못 시켰다가 한참을 아주머니와 떠들며 호르차타는 타코가 아닌 멕시코 음료라는 걸 알게 된 것도, K-pop에 관심이 많던 우버 아저씨가 왜 한국의 연예인들은 자살을 많이 하는지 물어 깊이 고민을 해 봤던 것도 모두 제 여행을 한층 다채롭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제 머릿속에 남아있는 건 앤디 워홀의 통조림이나 할리우드 사인이 아닌 일상 속에서 나눴던 짧은 대화들이 더 많은 거 같군요.

그냥 여행을 가서 들뜬 마음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정말 처음 보는 사람들과 아무 생각 없이 나눴던 대화들이 좋았던 건진 잘 모르겠지만 소소하게 대화를 하는 거 자체만으로 그날 하루가 더 풍성해졌던 건 확실합니다. 아마 우리들이 미국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낭만을 갖고 있는 것도, 그들의 자유로움과 여유로움을 부러워하는 것도, 그 기반에는 이런 스몰톡 문화가 깊이 자리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지나가는 행인 A 씨에 불과했던 당신과 자유롭게 스타벅스 최애 메뉴를 얘기하고 시간이 된다면 독특한 취향까지 알아가는 시간이 어색한 눈 맞춤 후 이어지는 30초짜리 적막보단 나은 거 같네요.

가끔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할 때마다 만나는 과일가게 아주머니가 부담스러워 일부로 빙 돌아갔었는데 앞으로는 과일 몇 개를 얻어먹으며 요즘 어떤 과일이 제철인지 얘기를 나눠봐야겠습니다. 안 그래도 팍팍한 인생인데, 몇 달에 한 번 힘들게 친구 또는 가족들과 만나서 팍팍함을 풀기보단 그냥 일상 속에서 편하게 풀어보는 건 어떨까요? 굳이 말을 걸고 싶지 않다면 강요하진 않겠습니다만, 마음 한구석 기억해 두셨다가 갑자기 누구에게라도 말을 걸고 싶은 하루가 생겼는데 마땅히 말할 주제가 없다면 날씨 얘기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설령 상대방이 싸가지 없는 박연진이라도 날씨 얘기는 할 말이 많을 테니 말이죠.

작가의 이전글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우리 지올팍 월클 맞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