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묘 앞 할아버지 할머니 패션
선글라스가 어색한 당신에게
동묘. 가보셨나요? 4번 출구로 나와 잔치 국숫집을 지나서 구석진 골목으로 들어가면 신세계가 펼쳐집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압도되는 할아버지들의 패션, 짝퉁인지 진퉁인진 모르겠지만 단돈 4만 원에 팔고 있는 입셀로랑 가디건까지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죠. 아마 한국에서 어떻게 옷을 입어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오히려 이상하게 입을수록 박수갈채를 받는 유일한 곳일 겁니다. 제가 쓰고 있는 선글라스는 애교죠. 사람들의 시선을 끌려면 파워 레인저 가면 정도는 쓰고 가야 합니다.
라섹을 하고 더딘 회복 기간을 겪고 있는 저는 덕분에 강제적으로 선글라스를 3개월 동안 착용하게 되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선글라스가 어색한 사람들은 이 검은색 안경이 약간은 불편할 겁니다. 뭔가 끼는 순간 사람들이 쳐다보는 거 같고 눈이 아파 실내에서 잠깐이라도 끼고 있으면 괜히 뒤에서 사람들이 연예인 코스프레를 한다고 놀릴까 봐 부끄러워 그냥 눈을 감고 있는 게 마음이 더 편했던, 20년간 무채색 옷만 즐겨 입던 저에게 선글라스는 인생네컷을 찍을 때를 제외하곤 너무 큰 도전이었습니다.
그날도 지하철을 타고 약간 주변 시선을 의식하며 선글라스를 주머니에 넣은 채 길을 가고 있었는데 앞에 할아버지가 두건을 쓰고 선글라스를 낀 채 앉아 있었습니다. 멋있더라고요. 당장이라도 지하철을 내려서 바이크를 타고 질주할 것만 같은 느낌의 멋있는 할아버지였습니다. 멋있다. 이 말의 의미를 요즘 들어 고민하고 있는데요, 지금까지 제 고민의 결론은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면서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할아버지는 제가 생각하는 멋에 너무나 부합하는 사람이겠군요. 안타까운 건 이런 멋을 추구하기가 우리나라에선 약간 어렵다는 것입니다.
제가 뭐 해외에서 오래 살다 온 것도 아니고 교포 출신도 아니지만 그동안 살면서 느낀 건 유독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국룰 문화가 심한 거 같습니다. 대학생 국룰 패션, 국룰 야식, 국룩 공부법 등 언제부턴가 자신의 모든 결정을 주변 사람들이 정해놓은 룰에 가둬놓기 시작했고 자신의 취향보단 다른 사람들의 취향에 맞춰가는 게 당연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제가 미국을 동경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나라는 국룰이란 문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리가 길든 짧든, 뱃살이 튀어나오든 말든 핑크색 크롭티를 입고 수박 귀걸이를 하고 다녀도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신을 소개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안녕하세요.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2학년 휴학 중인 이호균입니다'. 날 소개하라니까 학교를 소개하고 과를 소개하고 학년을 말한 다음에야 자신의 이름을 말합니다. 내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 말해줘야 하는 자기소개에서 자신을 맨 뒤로 밀어버리니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국룰에 의존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1호선 극성 아줌마들과 할아버지들을 제외하면 우리나라도 남들한테 그렇게 큰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속으로 지난 일주일 동안 지하철에서 봤던 사람들 중 가장 인상 깊게 옷을 입은 사람들을 떠올려보세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옷을 입고 잠수교를 걸은 루이뷔통 모델들이 어떤 옷을 입었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마당에 반쯤 벗고 있는 게 아니라면 아무도 당신한테 뭐라 할 사람이 없습니다.
앞으로 선글라스를 계속 끼겠단 얘기는 아니지만, 남은 인생 80년 정도는 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야겠습니다. 동묘에 가서 짝퉁 나이키 바람막이를 입든, 옷에 맞지 않는 정장을 입든 내가 이쁘면 그만인 거죠. 정장에 반바지와 운동화를 신고 선글라스를 끼고 걸어도 아무도 당신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남들이 국영수 공부하니까 똑같이 공부해 온 지난 10년이었지 않습니까. 그냥 입고 싶은 대로 입고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당신은 당신일 때 가장 빛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