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 가족이 방콕 가서 먹고 또 먹은 이야기
미뤄둔 휴가를 다녀왔다. 태국도 10월은 좀 덜 덥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며 항공권 예약부터 해뒀는데 웬걸. 낮기온은 32°C까지 오르고 7~8월과 큰 차이가 없다(Weather Spark 방콕 날씨 참조). 한국에서 긴 늦더위가 마침내 끝나고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10월 둘째주, 나와 남편, 아들 세 식구는 다시 여름옷을 주섬주섬 챙겨 들고 방콕으로 떠났다.
실내형 인간들은 쇼핑몰에 간다
태국은 큰 나라고, 수도인 방콕 또한 서울 면적의 2.6배에 이르는 대도시다. 여기저기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 있다. 우리 가족은 쇼핑을 즐기지 않지만 해외여행 가면 쇼핑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편이다. 몇 년 전까진 ‘저희 애가 아직 어려서’라고 말하곤 했지만, 이제 애가 만 9세다 보니 그런 변명도 민망하다. 우린 그냥 냉난방 잘되는 실내를 좋아하는 실내형 인간들이다.
여기서 쇼핑을 안 하고 뭘 했냐고 묻는다면..우린 먹고, 먹고, 또 먹었다. ‘쏨분 씨푸드’ 같은 비싼 음식점도 당연히 맛있었지만, 푸드코트에서 먹은 안 비싼 음식들도 맛있었다. 시암 파라곤 푸드코트에서 별생각 없이 주문한 똠얌라면이 얼마나 맛있던지 셋이 아주 코 박고 싹싹 긁어먹었다.
모든 날이 맛있었다
물론 쇼핑몰 식당만 간 것은 아니었다. 다른 식당을 물색할 때는 주로 네이버에서 ‘왓포 맛집 에어컨’, ‘아속역 맛집 에어컨’ 등으로 검색하여 현 위치에서 가깝고 시원한 식당들을 찾았는데, 신기할 정도로 모두 다 맛있었다. (일단 시원하면 음식 맛에 약간 덜 까다로워지는 효과도 없지 않다)
가는 곳마다 땡모반(수박 주스/슬러시) 하나씩 들이키면서 팟타이도 먹고, 똠얌꿍도 먹은 뒤 흡족한 기분으로 일어섰다.
야시장에도 가보고 길거리 음식도 먹어보고 싶은데 너무 덥고 위생이 걱정된다면? 다 방법 있다. '아이콘시암‘이라는 대형 쇼핑몰 G층에 ’쑥 시암(Sook Siam)'이라고, 야시장 느낌을 잘 살린 ‘실내‘ 시장이 엄청 큰 규모로 조성돼 있다. 수상시장 분위기를 내기 위해 군데군데 수로 비슷한 것도 깔고 배 모형도 갖다 놓은 것이, 관광객들의 취향을 잘 아는구나 싶다.
크고 화려한 왕궁과 사원들
정말로 일주일 내내 먹기만 한 것은 아니고, 틈틈이 관광도 했다. 차오프라야 강을 사이에 두고 가까이 붙어있는 왕궁(Grand Palace), 왓 포(Wat Pho) , 왓 아룬(Wat Arun)은 할 말을 잃게 하는 화려함으로 방문객들을 압도한다. 하늘을 찌르는 뾰족한 지붕과 탑들이 즐비한데, 그 표면은 여백 하나 없이 빼곡하게 정교한 문양들로 덮여있다. 심지어 그 문양들은 알록달록하거나 번쩍거린다. 왓포 사원에는 무려 46m 길이의 거대한 와불상도 있다. 규모와 화려함에 대한 집착을 끝까지 밀어붙였을 때 도달하는 어떤 경지라고 해야 할까.
방콕 시내에서 차로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아유타야(Ayutthaya)’의 사원들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몰락한 아유타야 왕국의 수도. 이곳은 한때 크고 화려했던 그 무엇의 흔적에 가깝다. 풍파에 허물어진 와중에도 그 규모와 아름다움이 과거의 영광을 짐작케 하고, 침략자들에게 목 잘린 불상들이 역사를 상기시킨다.
아유타야는 한국인 대상 가이드 투어 상품으로 다녀왔는데, 투어에 야시장이 포함돼 있는 바람에 결국 진짜 야시장도 잠깐 구경했다. 여기서 또 닭꼬치도 먹고 돼지고기튀김도 먹고..배부른 여행이었다.
인상적인 풍경과 맛들을 뒤로 하고 서울로 돌아와 보니 제법 쌀쌀했다. 아무래도 10월이라 더 좋았던 것 같다. 여름 성수기보다 관광지 인파도 덜하고, 날씨도 (미세하게나마) 덜 덥고, 아들은 학교 빠져서 신나고. 건기가 시작되는 11월이 더 쾌적하다고는 하던데, 역시 휴일 많은 10월이 딱 좋다.
몸은 돌아왔지만 마음은 아직 방콕에 남아 미적거리는 상태에서 각자 학교로, 회사로 흩어진 우리 가족. 한동안 불쑥불쑥 여행의 기억을 꺼내 함께 곱씹으며 '아 그때 참 좋았는데' 하며 지낼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