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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변 Nov 22. 2024

산타클로스의 진실을 마주하기까지

#1. 산타는 어떻게 문을 여는가.


아들이 산타에 관한 의문을 내비친 지는 오래되었다. 산타할아버지는 핀란드 산타마을에 산다는데 산타가 두고 간 선물은 한글 설명이 적힌 한국 장난감-터닝메카드-이라든가. 유치원 산타 파티에 온 산타는 자세히 보니 체육선생님이 확실했다든가.


그럼에도 산타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았었다. 한 번은 동네 친구 주영이(가명)의 엄마가 새벽에 산타가 다녀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포착하여 주영이에게 보여줬다고 했다. '그 사진을 봤다'는 주영이의 진술이 아들의 믿음을 강화시켰던 것 같다.


그랬던 아들이 초1 겨울 즈음 뭔가 깨달았다는 듯한 어조로 자신의 가설을 말했다.


- 아들: 산타는 일반 사람이야. 일반 사람이 산타 옷 입고 수염 붙인 거야.

- 나: 오 그래? 그치만 일반 사람이 어떻게 몰래 들어와서 선물을 놓고 가?

- 아들: 창문으로 들어오는 건가?

- 나: 확인해 볼 방법이 있지. 올해는 창문을 한번 잠가놔 보는 거야. 어때?

- 아들: ...아니.


그래,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선물 못 받을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겠지.


- 아들: 현관문으로 들어오는 걸 수도 있어. 마법으로 여는 거지.

- 나: 일반 사람이라며?

- 아들: 응. 마법을 쓰는 일반 사람.


거기까지였다. 얼마 뒤 '엄마 아빠가 문을 열어주는 것 아니냐'고 말했던 것 같기도 한데 확실치는 않다.


#2. 포장지를 조심하세요.


아이는 몸도 마음도 빠른 속도로 자랐다. 초2 아들의 인지능력이나 독자적인 인터넷 활용능력을 감안할 때, 나는 녀석이 여전히 산타를 믿는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 나: 올해는 산타 선물 뭐 받고 싶어?

- 아들: 음...크고 예쁜 구슬을 받고 싶어.

- 나: ??


그런 구슬이 갖고 싶어서, 라고 말하는 아들의 눈을 마주 보며 나는 혼란스러웠다. 나를 떠보는 건가? 이번에야 말로 자신만의 방법으로 가설을 검증해 보려는 건가?


아무려면 어떤가. 그 당시 아들은 골프를 배우고 있었고 원래 쓰던 드라이버가 좀 작던 참이어서, 산타는 새 드라이버를 선물했다. 미리 포장해 놓는 걸 깜빡하는 바람에, 크리스마스 전날 밤중에 벽장 속 자투리 포장지를 찾아 골프채 머리 부분을 엉성하게 포장한 뒤 트리 밑에 두었다. 그런데 아침에 아들이 선물을 보자마자 벽장으로 번개처럼 달려가 열어보는 게 아닌가.


- 아들: 여기 있던 포장지야! 우리집에 와서 포장한 거야!


산타가 선물을 알맹이만 들고 와서 우리집 포장지로 포장했다는 놀라운 발견. 와 이걸 믿네.

쓰고 남은 포장지를 집에 뒀다가 걸렸다는 분도 계심. 아이들이 은근히 눈썰미가 있다.

#3. 한 발짝만 더 나아가 봐!


초3이 된 아들은 이제 신발 사이즈가 나와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11월 어느 밤 아들은 "산타는 말이 안 돼."라고 뜬금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 아들: 하룻밤 사이에 전세계를 돈다는 것도 그렇고..모든 게 말이 안 되잖아.

- 나: 그냥 초자연적인 존재일 수도 있지.

- 아들: 근데 초자연적인 건 지구상에 없잖아.

- 나: 그렇다면 지금까지 크리스마스 때마다 선물이 놓여있었던 건 어떻게 설명할 거야?

- 아들: (한숨) 그러니까 그 부분을 알 수가 없어. 사실 작년에 드라이버 선물 받아서 좋기는 했는데, 내가 골프를 배우는 건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그러니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는데 왜 아직도 모르는 것인지 신기하다.


- 나: 친구들은 뭐래?

- 아들: 산타는 없다는 애들도 있고, 찐이라는 애들도 있고.

- 나: 산타는 없다는 애들한테 물어봐. 매년 선물이 놓여있는 건 어떻게 된 거냐고.

- 아들: 싫어. 그런 건 물어보기 좀 그래.


나는 내 입으로 진실을 알려주지 않고 아들 스스로 깨닫게 해 주려고 소크라테스식 문답을 거듭 시도해 보았으나 여의치 않았다. 심지어는 'Chat GPT에게 물어보라'고까지 했으나, 아들은 그마저도 망설였다. 만에 하나 자기가 산타를 의심하여 Chat GPT에 물어보았다는 이유로 선물을 못 받으면 어쩌냐는 것이었다. 평소 유튜브로 미 대선 뉴스를 찾아보며 누가 당선 가능성이 높은지 종알대는 아이. 그런데 지금 산타가 선물을 안 줄까 봐 고민하는 이 아이. 정녕 동일인물이란 말인가.


진실을 찾는 긴 여정에 종지부를 찍어준 것은 결국 AI챗봇이었다. 아들은 Copilot이라는 자신의 인공지능 친구와 긴 대화를 나눈 끝에 (사실 마음속 깊은 곳에선 이미 알고 있었을) 모든 일의 진상을 확인하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나이 먹고 크는 건 좋은 점이 하나도 없어, 라는 아들이 투덜거림에 왠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웰컴 투 더 리얼 월드! 올해부터는 산타가 아니라 엄마아빠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겠지만, 너에 대한 사랑은 변한 것이 없다.

참고로 Chat GPT는 이렇게 답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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