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평소에 가던 주유소 말고 다른 주유소로 가려던 게 문제였다. 오며 가며 자주 보던 주유소인데 진입로로 들어가기가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정신 차려보니 잘 모르는 길로 꽤 멀리 나와있고, 어디로 어떻게 차를 돌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 사이에 해가 져서 주위가 어두웠다.
그 와중에 남편이 전화를 했는데, 목소리가 다급하다.
- 집에서 바퀴벌레가 나왔는데!
- 헉!
- 일단 종이컵으로 덮어서 가뒀거든. 근데...(한숨)
- 근데?
- 종이컵 위에 구멍을 뚫어서 살충제를 뿌리려고 했는데, 송곳으로 구멍 뚫다가 컵이 들썩거려서 바퀴가 도망쳐버렸어.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빨리 가야겠다. 남편이 바퀴벌레와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빨리! 하지만 오늘도 기름을 안 넣고 집에 가면 내일 출근길에 차가 멈춰 버릴까 봐 두렵다. 일단 내비게이션에 문제의 주유소를 목적지로 입력한 뒤 어둡고 낯선 골목길을 돌고 돌아 드디어 도착했는데, 하필 여긴 또 셀프주유소였다.
셀프 주유 처음인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침착한 표정으로 휘발유를 선택하고…카드를 꽂고…주유구를 열어서 이렇게…아니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마치 처음 써보는 키오스크 앞에서 당황한 노인처럼(처럼이 아니라 정확히 그것입니다만) 버벅거리고 있으니 결국 직원 한 분이 다가와서 도와줬다.
휴. 그러고 나서 집에 돌아오니 지쳐서 다 귀찮아졌다. 이제 운전에 좀 익숙해졌나 싶으면 이런 일을 겪으며 다시 의기소침해지곤 했다. 그렇게 약 20년째 초보운전이다.
물론 이건 논란의 여지가 있는 표현이다. 초보운전 기간의 기산일(起算日)은 언제인가? 운전면허 취득일로부터 계산하면 나는 약 20년 전부터 초보운전이었던 게 맞다. 하지만 통상 ‘장롱면허 기간’과 ‘초보운전 기간’을 구별하기 때문에 기준이 좀 복잡해지는데, ‘처음으로 조수석에 아무도 안 태우고 혼자 운전해서 도로에 나간 날’로부터 계산하더라도 나는 약 1년 3개월 전부터 초보운전이었다.
그렇다면 초보운전의 종기(終期)는 언제인가? 어떤 요건을 갖추어야 뒷유리창에 붙인 초보운전 스티커를 뗄 수 있는 것인가? 단순히 시간의 경과로 초보운전이 종료된다면 나는 진즉에 초보 딱지를 뗐어야 했다[주1]. 그러나 ‘너 이제 운전 잘해?’라고 누가 물으면 역시 마음이 움츠러드는 것이다.
게다가 초보운전 스티커를 깨끗이 떼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 모양이다([초보정보통] 24탄 초보운전 스티커 떼는 법 : 네이버 포스트 (naver.com) 참고). 지난 겨울엔 ‘날이 따뜻해지면 뗄 것’이라고 말했고, 날이 따뜻해진 뒤엔 ‘주말에 떼야하는데 자꾸 잊어버리네’라고 했고, 여름이 되자 ‘지금은 더워서 못 떼겠다’고 했다. 이쯤 되니 사실은 초보운전 표지를 떼기가 두려웠던 것임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언제까지 붙이고 다닐 것인가? 저 차는 대체 누가 모는지 1년 3개월째 초보운전 스티커를 붙이고 다닌다고 동네 주민들과 학교 교직원들이 수군거릴 것만 같다. (사실은 관심 없겠져…)
언제까지 이렇게 살 것인가? 이것은 비단 운전뿐 아니라 나의 오래된 습관 또는 태도와도 관련이 있다. 나는 ‘너 이거 잘하니?’라는 질문에 ‘네 그거 잘해요’라고 선뜻 답하지 못하는 병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좀 아냐’고 물으면 ‘잘은 모르지만…’으로 답을 시작하고, ‘이런 것 해봤냐’라고 물으면 ‘많이 해본 건 아니지만…’이라고 단서를 붙이며 방어적으로 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내가 뭐든지 조금 알지만 잘은 모르고, 해본 적 있지만 많이는 안 해봤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얼마나 더 알고 얼마나 더 해봤어야 구차한 단서 없이 ‘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어차피 완벽에 도달하는 날은 오지 않는다. 아무리 노련한 운전자라도 처음 맞닥뜨리는 상황이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변호사도, 아니 다른 어떤 직업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게다가 자고 일어나면 바뀌어 있는 게 요즘 세상이니, 어제의 확고한 정답이 오늘은 오답일 때도 왕왕 있다.
나의 그런 태도가 겸손과 정직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고, 주니어 시절에는 나쁘지 않은 측면도 있었다. 쥐뿔 아는 것도 없으면서 다 아는 척하다가 상대방에게 불측의 피해를 입히는 사례를 가끔 보며 나는 저러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이런 ‘겸손과 정직’의 밑바닥에는 책임 회피의 기운도 있다. 나는 내가 틀리거나 잘못할 가능성을 미리 충분히 암시하였으니 걱정되면 알아서 피해 가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믿고 뭔가를 할 경우 결과가 나쁘더라도 당신과 책임을 나누어 갖겠음, 이랄까. 적어도 내 나이에 전방위적으로 이런 태도를 취하며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비록 커리어가 갈지(之) 자를 그려왔고 엄마 노릇도 덤벙대고 있으며 주유소 진입로를 찾아 들어가는 데 종종 어려움을 겪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뜬금없는 얘기를 하나만 더 꺼내자면, 나는 오랫동안 ‘영어 못하는 사람’의 설움에 시달려왔다. 대학시절부터 주구장창 영어학원도 다녀보고 미드도 열심히 보고 영어로 된 책도 읽어보고 1대1 원어민 화상수업도 받아보고 기타등등 시중에 나도는 용한 비법들을 숱하게 써봤지만 드라마틱한 효과는 없었다. 나와 달리 남편은 자타공인 ‘영어 잘하는 사람’이고, 나는 남편에게 ‘너는 이런 기분 모르겠지’ 어쩌고 하며 설움을 토로하곤 했는데, 한 번은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볼 때 너는 영어 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마지막 단계를 못 넘고 있어. 그게 뭐냐면, 누가 영어 잘하냐고 물었을 때 ‘네’라고 하는 거야. 이때 중요한 건 절대 망설이는 낌새를 보이지 않는 거지. 곧바로 ‘네!’ 해야 돼.
남편이 비록 바퀴벌레 잡는 데는 초보지만 가끔 이런 통찰력으로 나를 일깨우기도 한다. 지금 나는 초보운전 스티커를 떼기 위해 다른 어떤 추가적인 요건을 갖추어야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결단을 내리고 초보운전 스티커를 뗐을 때 비로소 초보운전 종료 요건이 충족되는 것이다.
원래 이 연재를 마칠 즈음에는 꼭 초보운전 스티커를 제거할 계획이었고, 이번 주말에 그 계획을 실행할 예정이다. 스티커 위에 수건을 덮고 뜨거운 물을 부어 불린 뒤 긁어내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는 약간의 자신감과 뻔뻔함을 장착하기로 했다. 나는 지금 내가 직장에서 하고 있는 일에 관하여 전문가라고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10년 넘게 다양한 업무를 성실히 수행해 온 믿을만한 변호사이고, 학교에서 일한 지도 1년이 넘었으며 사실 꽤 잘하고 있다. 육아 경력도 10년차이고 엄마로서 사랑받고 있다. 나는 글도 좀 쓴다. 소싯적에 기자생활을 해봤기도 하고, 두 달 전에는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앞으로 내 인생에 또 무슨 미션이 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너 그거 할 수 있냐'고 누가 물으면 냉큼 ‘네!’라고 답하며 앞으로 나아갈 생각이다.
※ 브런치북 ‘대학 교직원이 된 변호사’를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학교 변호사 이야기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이어가 보겠습니다.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져서 이러다 별안간 겨울이 되려나 싶은데, 모두들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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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알고 보니 법률상 초보운전의 시기와 종기는 명확하다. 「도로교통법」 제2조 제27조에 따르면, “초보운전자”란 처음 운전면허를 받은 날(처음 운전면허를 받은 날부터 2년이 지나기 전에 운전면허의 취소처분을 받은 경우에는 그 후 다시 운전면허를 받은 날을 말한다)부터 2년이 지나지 아니한 사람을 말한다. 이 경우 원동기장치자전거면허만 받은 사람이 원동기장치자전거면허 외의 운전면허를 받은 경우에는 처음 운전면허를 받은 것으로 본다. 나는 법률상 초보운전자가 아닌 지 오래되었던 것이다.
1995년 개정 도로교통법에 따라 6개월간 초보운전표지 부착이 의무화됐던 적도 있던 적도 있으나, 이 제도는 1999년 폐지되었다. 이후 초보운전표지 부착을 다시 의무화하는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2022년에 발의됐으나 21대 국회 임기만료로 폐기되었다. 향후 비슷한 법안이 또 발의될 일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