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냥 퇴근하면 아들 숙제나 봐주고 귤 까먹으며 드라마나 보고 싶은데, 뉴스가 너무 드라마틱해서 드라마에 집중할 수가 없다. 게다가 MBC 금토드라마 <지금 거신 전화는>은 4회가 재밌는 장면에서 끊겼는데, 갑자기 토요일마다 대통령 탄핵안을 표결하게 생긴 황당한 상황으로 인하여 쭈욱 결방이 예상된다. 기어이 헌법책 열어보게 만드네 정말.
대한민국헌법
제84조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
대통령은 '내란죄' 같은 극히 희귀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재직 중에 형사재판을 받을 일이 없다. 그런데 그 어려운 걸 이번 대통령이 해낼 모양이다.
내란죄가 무엇인가? 학교에서 한창 형법각칙 공부하던 시절에도 '제1장 내란의 죄' 부분은 진지하게 읽어본 적이 없다. 시험에도 잘 안 나오고 어차피 이 죄로 재판 받는 사람은 이제 없을테니까, 라고 생각했으니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지금 와서 한번 읽어본다.
형법
제87조(내란) 대한민국 영토의 전부 또는 일부에서 국가권력을 배제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자는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처벌한다.
1. 우두머리는 사형,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에 처한다. <-원래는 '수괴(首魁)'라고 하였는데 2020년 알기 쉬운 우리말('우두머리')로 변경되었다.
2. 모의에 참여하거나 지휘하거나 그 밖의 중요한 임무에 종사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처한다. 살상, 파괴 또는 약탈 행위를 실행한 자도 같다.
3. 부화수행(附和隨行)하거나 단순히 폭동에만 관여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에 처한다.
'국헌을 문란하게' 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도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다.
형법
제91조(국헌문란의 정의) 본장에서 국헌을 문란할 목적이라 함은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함을 말한다.
1.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것
2.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 <- 일단 국회에 군대를 보내 의결을 막으려 한 것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 방법이 없지 싶다...
'폭동'이 뭔지는 12.12. 사태 판결문에 제법 자세히 나오는데, 일부만 발췌해 본다.
형법 제87조의 구성요건인 폭동의 내용으로서의 폭행 또는 협박은 일체의 유형력의 행사나 외포심을 생기게 하는 해악의 고지를 의미하는 최광의의 폭행ㆍ협박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를 준비하거나 보조하는 행위를 전체적으로 파악한 개념이라고 할 것이다. (중략)... 따라서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조치의 그와 같은 강압적 효과가 법령과 제도 때문에 일어나는 당연한 결과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법령이나 제도가 가지고 있는 위협적인 효과가 국헌문란의 목적을 가진 자에 의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에는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조치가 내란죄의 구성요건인 폭동의 내용으로서의 협박행위가 되므로 이는 내란죄의 폭동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대법원 199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그냥 여기까지만 알아봐도 될 것 같다.
그러니까 어제부터 경찰이 "윤석열 긴급체포 가능"이라고 말하고 있는 건 과격한 레토릭이 아니라 작금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담담히 설명한 것이다. '긴급체포' 부분은 나도 마르고 닳도록 밑줄 그으며 공부했으므로 비교적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아무리 눈 비비고 다시 봐도 긴급체포 요건을 충족한다. 수사기관에 계신 분들도 생각이 다르지 않을텐데 아직 당황스러워서 실행까지는 못한 듯...
형사소송법
제200조의3(긴급체포) ①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은 피의자가 사형ㆍ무기 또는 장기 3년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해당하는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고,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유가 있는 경우에 긴급을 요하여 지방법원판사의 체포영장을 받을 수 없는 때에는 그 사유를 알리고 영장없이 피의자를 체포할 수 있다. 이 경우 긴급을 요한다 함은 피의자를 우연히 발견한 경우등과 같이 체포영장을 받을 시간적 여유가 없는 때를 말한다.
1. 피의자가 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있는 때
2. 피의자가 도망하거나 도망할 우려가 있는 때
그래서, 대통령이 정말 체포 내지 구속되고 나면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대한민국 헌법
제71조 대통령이 궐위되거나 사고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국무총리, 법률이 정한 국무위원의 순서로 그 권한을 대행한다.
대통령이 잡혀가서 구치소에 있는 것이 "사고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때"에 해당하냐 아니냐를 놓고 의외로 갑론을박이 있는 모양이다(법조계 ‘궐위·사고’ 요건 해석 놓고 의견 분분 [비상계엄 후폭풍] | 세계일보). 먼지 낀 헌법책을 펴보니 이렇게만 적혀있다.
성낙인, 헌법학(제17판), 법문사, 555~556면
..사고(事故)라 함은 대통령 재임 중 신병∙해외여행 등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경우와, 국회의 탄핵소추의결로 헌법재판소의 탄핵결정이 있을 때까지 권한 행사가 정지된 경우를 말한다. (중략) 예컨대 대통령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든가 회복불가능한 말기암에 걸린 경우나 뇌사상태 등과 같은 중병에 처해 있을 경우에는 신속하게 권한대행을 정하여 대통령 선거에 대비하여야 한다. (중략) 대통령 유고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을 누가 어떻게 내려야 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법적 공백상태에 있다.
...역시 난 "정신질환" 쪽이 유력해 보이기는 하는데, 그에 대한 최종 판단을 누가 어떻게 할지는 법적 공백상태라고 하니 별 수 없다. 지금은 제정신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대통령이 여전히 대통령 권한으로 결재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상황이고, 내란 혐의로 구속될 경우에는 이 버튼을 못 누르게 되는 게 맞는지 어떤지는 책에 안 적혀있어서 아무도 모른다. (묵념)
오랜만에 열어본 헌법에는 이런 조항들도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66조 ①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며,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한다.
②대통령은 국가의 독립ㆍ영토의 보전ㆍ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
③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
④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속한다.
제69조 대통령은 취임에 즈음하여 다음의 선서를 한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현타 온다. 가장 간단한 답은 대통령 스스로 지금 사임하는 것이다. 그게 싫다고 하면 국회에서 이번 주말에 탄핵소추안을 가결시켜야 한다. 그래야 다음 주말에는 <지금 거신 전화는>이나 보면서, 대통령실 대변인이 츤데레 유연석인 세계관을 비로소 좀 편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