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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최선의 방식일까

영화 <하얼빈>이 남기는 잔상

by 수수변 Jan 07. 2025

항일무장투쟁이란 것은 한마디로 정신 나간 짓이라고 할 수 있다. 한때 의병이었다가 마적이 된 박점출(정우성 분)은, 비아냥을 한껏 실어, "얼마나 죽어야 독립이 되는데?"라는 매우 타당한 지적을 한다. 이는 극중 또다른 변절자의 입을 통해 "이등박문 하나 죽인다고 독립이 되겠소?"라고 변주되기도 하는데, 역시 타당한 지적이다. 외교권을 빼앗기고, 군대는 해산되고, 더 이상 '국가'라 불릴만한 형체도 남아있지 않은 마당에, 각지에서 수십∙수백 명 단위로 모인 의병이 제국의 잘 조직된 진짜 군대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쳐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계획을 달리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영화 <하얼빈>에 등장하는 독립운동가들은 그들 스스로도 이 계획의 허황함을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곤 한다. 극 초반 처절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때조차도 그들은 별로 환호하는 기색이 없다. '이런다고 독립이 되겠냐'는 반복되는 질문에 대하여 그들은 한 번도 정면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매번 '먼저 간 동지들의 죽음이 너무 무겁다'는 말만 울며 반복한다


이미 치른 희생이 많다는 것은 냉정히 말하면 매몰비용이고, 앞으로 계속하여 희생할 근거가 되기는 어렵지 않은가? 그럼에도 안중근(현빈 분), 우덕순(박정민 분), 김상현(조우진 분), 이창섭(이동욱 분), 공부인(전여빈 분)은 춥고 지친 얼굴로 묵묵히, 혹은 서로 말다툼을 벌이며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함경도 설산을 지나 블라디보스토크로, 다시 하얼빈으로. 그것은 민족의 독립이라든가 뭔가를 희망하며 걷는 걸음이라기보다는, 희망이 안 보임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가 없어서 계속 하는 절망의 몸부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그 투쟁의 결과를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혹은 그렇게 묘사된) 것일 수도 있다. 독립군이 신아산 전투에서 승리하고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으나 이듬해의 한일병합선언과 36년간의 식민지배는 막지 못했다. 이후에도 무장독립운동은 이어졌지만 결국 식민지배를 종료시킨 것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외부 요인이었으니, 무장독립운동이 목표한 바를 이루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그들의 투쟁에서 우리는 의미를 찾는다. 그것은 존재를 부정당하는 상황에서 계속 존재하기를 포기하지 않기 위한 싸움이었고, 당장 적을 물리치지는 못할지언정 적이 스스로 패망할 때까지 오랜 세월 소멸하지 않고 존재를 이어갈 힘이 되었으며, 마침내 때가 왔을 때 다시 일어설 힘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영화를 보며 새삼 박정민이 참 좋은 배우라는 느낌이 들었다. 멋있게 수염을 기른 현빈과 이동욱이 한 화면에 나와서 상념에 빠지거나 담배연기를 뿜고 있으면 아무래도 좀 시대극 컨셉의 화보 같은 느낌을 주는데, 박정민이 적재적소에 등장해 자연스러운 연기로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아니 그렇다고 현빈과 이동욱이 덜 좋은 배우라는 뜻은 아니고, 잘생겨서 잘못됐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영화가 자꾸 분위기 있는 조명 아래, 혹은 이국적인 풍광 위에 잘생긴 피사체를 배치하고 멋진 영상을 보여주는 데 정신이 팔려 가던 길을 못 가고 헤매는 감이 없지 않은 것이다. 무채색 코트에 모자를 눌러쓴 전여빈은 정말 멋진데, 그조차도 종종 화보에 분위기를 더하기 위해 동원된 여성 모델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있다. 


덕분에 스틸컷은 하나하나 버릴 것 없이 아름답지만 영화 자체는 다소 생기가 없는 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모든 장면에 깔리는 비장하고 웅장한 음악도, 내부의 밀정을 색출해 처리하는 이야기도 별로 극적 긴장감을 끌어올리지는 못한다. 애초에 극적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쫄깃한 연출 같은 걸 의도한 영화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이 안중근과 하얼빈 의거를 다루는 최선의 방식인가? 물론 2년 전에 나온 뮤지컬 영화 <영웅>과 마찬가지로, <하얼빈>도 영화가 안중근을 이야기하는 하나의 방식일 수 있다. 의미 있는 인물과 이야기가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만, 그래도 좀더 나은 접근 방식이 있을 것만 같은, 안중근을 소재로 한 가장 훌륭한 영화는 아직 나오지 않은 것만 같은 아쉬운 마음은 남는다.


덧) 이토 히로부미 역을 맡은 배우가 눈에 익어서 찾아봤더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과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본 배우 릴리 프랭키였다. 유명 일본 배우가 이 배역을 맡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용기 있는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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