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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윤수 Feb 09. 2023

엘피가 무거우면 뭐가 좋나요?

왜 엘피를 듣나요 01

아날로그 오디오로 음악을 들으며 한 생각들을 적는 시리즈입니다. 그렇다고 종이에 써 옮긴 건 아니고 아이패드로 썼습니다. 아이패드만 써 쓰다보니 상당히 대충 쓴 감이 있습니다. 대충 즐겨주세요.


엘피들 중에는 180g이네 200g이네 하며 소위 ‘중량반’인 것을 세일즈 포인트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문제는 그게 뭐가 좋은지 안 알려주는 경우가 대다수더라고요. 그래서 온갖 유추가 떠돌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튼튼하네, 안 깨지네 같은 것도 있는데 PVC 엘피를 던져 깰 수 있을 정도의 완력을 가지고 있다면 깨진 엘피의 아쉬움을 상쇄할 만큼 스스로의 완력에 뿌듯해 해도 됩니다. 힘 줘 구부리면 깨지긴 하는데 그렇게 의도적으로 접근하면 웬만한 생활용품은 다 부서집니다.


세간의 오해와 달리, 무거운 엘피가 좋은 이유는 딱 둘 뿐이며 그 둘 마저도 확정이 아닌 가능성에 그칩니다.

1. 소리골을 더 깊게 새길 수 있다. 그래서 더 넓고 더 분명한 소리를 ‘담을 수‘ 있다.

2. 덜 휜다. 안 휘는 건 아니고 덜 휜다. 빈도와 강도 모두.


‘소리골을 더 깊게 새길 수 있다’부터 살펴볼게요. 중량반이란 건 같은 넓이의(엘피의 지름은 12인치로 정해져 있으니)  원판을 만드는데 더 많은 재료를 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넓이와 밀도는 한계가 있으니 두께가 늘어나겠죠. 보통 110g 정도를 쓰는데 180g을 썼다면 70g 만큼 더 두꺼워진 겁니다. 두께가 두꺼워졌으니 소리골(Groove, 소리의 정보를 담은 골자기 모양)도 깊게 팔 수 있겠죠.


턴테이블 오디오 시스템에서 소리 신호는 카트리지 끝에 달린 바늘이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움직였는지로 인해 정의되고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바늘은 엘피의 소리골을 따라 움직입니다. 바늘은 소리골의 깊이와 모양을 따라 분 당 33바퀴나 45바퀴를 나아가며 양이 변화하는 전기를 만들고, 전기는 신호가 되어 앰프 같은 오디오 시스템의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소리골이 깊으면 그것을 따라가는 바늘 역시 더 크게 움직이고, 전류량의 변화폭이 커지며, 정의하여 만들 수 있는 소리의 폭이 넓어지는 동시에 세밀해집니다. 골이 깊어졌으니 바늘이 더 깊게 들어가며 더 깊은 저음을 정의할 수 있고 해당 음역대에 더 넓은 골 깊이를 쓰기에 보다 정확한 길, 보다 정확한 중고음을 정의할 수 있습니다. 결국 엘피가 두꺼워 소리골이 깊으면 더 좋은 소리를 담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중량반=소리가 좋다.‘가 아니란 겁니다. 중량반은 좋은 소리를 만들 수 있는 토대일 뿐 좋은 소리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엘피는 결국 사람이 아날로그 공정으로 만듭니다. 제작자의 감과 선택을 바탕으로 분명하게 조절할 수 없는(=0과 1로 조절할 수 없는) 기계를 써 만듭니다. 그렇다보니 두꺼운데 얇게 판 엘피도 있고(스펙을 못 쓴) 깊게만 판 것도 있고(세밀한 정보가 없는) 애초에 팔 소리 정보 자체가 잘못되어 엄하게 판 것도 있고(스펙이 아까운) 잘 만든 것도(굿!) 있습니다. 중량반은 마치 곱셈에 들어가는 상수와 같습니다. 일반반이 1이라면 중량반은 2이긴 한데 엘피란 수식은 2 다음에 +가 아니라 x가 붙습니다. 그래서 =은 1이 될 수도 있고 2나 4가 될 수도 있으며 0.5나 2억이 될 수도 있습니다. 뭐, 1보단 2가 좋긴 합니다.


여담으로 옛 엘피 중에는 ’딥 그루브(Deep Groove)’ 라 불리는 스펙을 가진 물건들이 있습니다. 1960년대 언저리까지 미국에서 나오던 물건인데 라벨 쪽에 쑥 들어간 링이 있어 그리 부릅니다. 오래된 엘피의 상징, 종종 퍼스트 에디션의 상징이라 스펙으로 취급하는데 이 딥 그루브가 있는 엘피는 중량반이기도 합니다. 두꺼워야 ‘딥‘ 그루브를 남길 수 있으니까요. 60년대 중반 이후 엘피가 점점 얇아지기도 했고(재료를 조금이라도 아끼는 편이 좋으니까) 스탬핑 방식이 달라지기도 하며 딥 그루브 역시 점차 사라졌고, 딥 그루브는 특정 시절에 나온 물건임을 보증하는 스펙으로 남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엘피들의 음질 역시 전반적으로 열화되며(두께가 줄며 골 깊이도 줄었으니) 딥 그루브는 좋았던 시절의 음질 좋았던 물건(대개 퍼스트나 세컨드) 임을 보증하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이제 덜 휘는 걸 살펴보죠. 중고반 많이 사본 분이나 산 적은 몇 번 없는데 재수가 없는 분이나 진짜 끝내주게 재수가 없어 새 것임에도 불량인 엘피를 경험하신 분은 알 겁니다. 휘어서 소리가 튀거나 심지어 다음으로 안 넘어가는 경우를 경험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속상하죠. 게다가 재생이 된다고 한들 역시 문제인데, 휘어 튀어나온 구간은 바늘을 누르는 압력이 커지는데 결국 순간적으로 침압이 커진 것과 같습니다. 침압이 커지면 바늘이 더 깊게 들어가거나 캔틸레버가 더 휘청이며 저역이 더 나옵니다. 결국 순간적이나마 대역 밸런스가 무너집니다. 음악의 bpm이 33이나 45의 배수가 아닌 이상 불협하며 주기적으로 무너지는 음질이 등장하여 고통스러워 집니다. 무겁고 두꺼운 엘피는 이게 덜 합니다. 빈도와 강도 모두.


종이는 잘 휘청거립니다. 쇠파이프는 웬만해선 안 휩니다. 소재 강도의 문제도 있지만 두께의 영향도 있습니다. 두꺼우면 덜 휩니다. 엘피도 그렇습니다. 기울어져 보관되었거나 위에 무거운 게 올라가 있었거나 뜨듯한 곳 위에 오래 있었거나 애초에 불량이거나 우주의 기운을 많이 받은 엘피는 휩니다. PVC로 만들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얇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재료를 많이 써 무겁고 두꺼운 엘피는 그게 덜 합니다. 휠 가능성도 적고 휘어도 적게 휩니다. 튈 일도 음질이 무너질 일도 덜 합니다.


다만 이 역시 한계가 있으니 ‘안‘ 휘는 것은 아니란 겁니다. 세상에 아예 안 휘는 엘피는 정말 몇 없습니다. 아세테이트 래커나 증착가공한 마더 디스크나 스탬퍼 같은 걸 엘피라 치면 안 휘는 엘피가 있긴 있다만 그런 걸 듣는 사람은 엔지니어와 일부 엘피 환자 빼곤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소비하는 엘피는 다 휠 수 있습니다. 제 아무리 중량반이라고 해도 보관을 허투루 면 휘고 처음부터 불량이라 휘어서 나올 수도 있습니다. 보관하다 휘었으면 슬프면 되고(피는 방법이 있긴 한데 리스키하거나 비쌉니다) 처음부터 휘어 나왔다면 교환하면 되는데, 안타깝게도 엘피 중에는 교환용 예비품도 없을 만큼 한정한 양으로 출시되는 게 많죠. 사실 이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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