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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아 Mar 19. 2024

옷과의 화해 (1)

얼갈이 겉절이

엄마가 살아계셨을 때는 생각지 못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옷은 엄마가 나에게 줄 수 있었던 몇 안되는 것들 중 하나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강원도의 한 특목고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던 때의 일이다. 논술을 준비하려면 신문을 꾸준히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문을 구독했는데 할 것들이 많고 바쁘다보니 매일 신문 한 부를 본다는 게 도저히 무리였다. 읽지도 못한채 방 안에 쌓여만 가는 신문들을 보며 스트레스를 받던 중에, 다른 몇몇 친구들은 부모님들이 중요한 기사나 좋은 칼럼들만 골라서 한 눈에 들어오도록 노트에 스크랩을 해서 정기적으로 보내주고 있는 걸 보게 되었다. 이슈들을 어떤 관점에서 보면 좋겠는지에 대한 논평을 짤막하게 메모해 주시는 경우도 많았다.

"엄마! 나도 이 곳의 다른 친구들처럼 엄마가 기사들을 좀 스크랩을 해서 보내줘. 그렇게 해주면 쉬는 시간에라도 틈틈이 뉴스들을 팔로우할 수 있을 것 같애."


며칠 후, 엄마가 보내온 두텁디 두터운 기사 스크랩을 본 순간, 짜증이 확 올라왔다.

"엄마... 내가 너무 바쁘니까 필요한 것만 좀 볼 수 있게 도와달라는 거였잖아. 이렇게 모조리 다 오려 붙여서 보낼거면 그냥 신문을 갖다 보지 스크랩을 왜 해달라고 했겠어! 아 됐어요."


지금에 와서야 엄마가 그 때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학부모님들을 학교에서 초대했던 날 보았던 그 학교 학생들의 엄마들 중에는 변호사나 약사, 교수 등등 학력이 좋으신 분들이 많았다. 공부에 대해서 잘 아시는 그런 분들이 보내주시는 스크랩이 내가 언뜻 보기에도 좋아 보였었나보다. 아마도 엄마는 중요한 기사가 어떤 것들인지, 잘 써진 칼럼이 어떤 것들인지 분별하기 어려웠을 거였고, 짧은 시간에 보면서 활용하기 좋도록 정리해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몰랐던 게 당연했다. 내가 생각이 짧았다.


나는 그 일에 대해 별 생각 없이 잊고 지나갔지만, 엄마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로부터 한두달쯤 뒤 학교 체육관에서 열리는 교내 댄스파티가 있었다. 그 날 엄마는 인천에서 강원도 횡성까지 운전해 와 내 방으로 찾아왔다. 엄마는 말없이 가방을 열더니 무언가를 꺼내어 내 앞에 촤라락 펼쳐보였다. 그리고 말했다.


"입어봐."


엄마가 뜨개질로 만든 무릎까지 오는 길이의 원피스였다. 오랜지색과 살구색과 황토색이 섞인 듯한 바탕에 중간중간 갈색톤의 포인트가 들어가 있었고, 너무 얇지도 두텁지도 않아 춤추기에 딱 좋았고, 치마 부분이 A라인으로 퍼져 있어서 엉덩이를 흔들면 치마가 찰랑거렸다. 엄마는 내가 이 드레스를 입고 댄스파티에 갈 것을 염두에 두고 디자인한 듯 했다. 엄마가 내 몸의 수치를 잰 적이 없었는데도 신기할만큼 사이즈가 딱 맞았다.


그 전까지 엄마가 뜨개질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하는 뜨개질인데, 그것도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그토록 크고 멋진 드레스를 만들었다니...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얼마나 열심히 뜨개질을 했을지.


옷은 항상 엄마가 나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고 표현하고 싶은 마음, 나에게 좋은 것들을 주고 싶은 마음, 내가 어디에서 누구와 어울리든 기품있는 모습이었으면 하는 마음, 미안한 마음... 내 방은 엄마가 표현한 마음들로 창고처럼 가득히 채워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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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갈이 겉절이 >


요즘 얼갈이가 제철이라 싸고 맛있다.

얼갈이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남편은 요즘 내가 만들어주는 얼갈이 겉절이를 진심 맛있게 먹고 있다.


겉절이 양념은 아래와 같다.


설탕, 식초, 다진 마늘 1큰술씩.

까나리 액젓 반큰술.

간장 3큰술.

고추가루 3~4큰술.

생강가루 아주 살짝.

귀찮아도 다진 파 꼭 넣기.

마지막으로, 나의 치트키는 게딱지장이다. 코스트코에서 멋모르고 샀던 게딱지장을 겉절이 양념에 조금 넣어 주었더니 겉절이가 굉장히 풍미있어졌다.



* 유튜브 '어남선생 레시피' 에서 류수영 님의 '양념게장맛 겉절이' 레시피를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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