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려고 강호랑 나눈 톡을 캡처하고서야 알았다. 답장란을 보니, 날 '엄마'로 저장하지 않았단 걸. 요 녀석, 이름 불러줘서 고맙다 해야 하나, 그래도 엄만데, 남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이니 좀 섭섭하다 해야 하나. 내가 올린 글 중, 그나마 자기 이야기 나오는 게 재밌다는 아이
각설하고, 오늘 아침에 용기 내서 강호에게 뒤늦게라도 용서를 구했다. 수줍게 꺼낸 말을 무색하게 만들었던 강호의 쿨함에 그저 감사했던 하루였다.
작년 12월, 한국 가기 전에 강호가 집구해서 나가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집 구할 때까지만 있겠다고 그때까지만 기다리라고, 나가준다고. 이놈에 주둥아리가 문제였다. 낳았으니 책임지고 키우는 게 당연할진데, 애가 좀만 잘못하면 '나가'를 입버릇처럼 했었다. 어려서아직 자립할 힘이 없는 아이에게 갑질이란 갑질을 부렸더랬다. 하도 들어 그나마 그 말엔 내성이 생겼으나, 미묘한 뉘앙스 차이로 크게 상처를 준 날이바로 그날이었다.
진학문제로 날이 서있던 내게 강호는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럼 엄마가 짐을 벗겠네."
"그럼 내가 짐덩이란 얘기야?"
이야기가 왜 그리로 튀지.남들 다 가는 대학, 안 가겠단 말에 화가 치밀어 올라 쓴 반어법이었다. 강호를 짐덩어리라 생각하고 한 말이 아니었다. 순간 당황했다. 그 말이 그 말처럼 들릴 수 있었겠지만, 의도한 바가 아니었기에 억울했다. 그렇게 오해는 점점 감정의 골을 깊이 팠고, 그러던 와중에 이놈에 주둥아리 또 한 건 했다. 화났을 때 미국애들이 무심코 내뱉는 말인 "piss of shit"을 아무 생각 없이 뱉었다. 강호는 입을 닫았고, 공기는 싸늘히 식었다.
출국 바로 전 날, 스벅에 가서 얘기하자니, '내 너의 마지막 소원 들어주마'하며 무거운 마음을 움직거리는 것 같았다. 결제하려고 하니, 자기 건 하지 말라며 기어코 따로 계산한 아이. 내가 무심코 뱉은 말 때문에 얼마나 많이 아프고 힘들었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땐 외면했었다. 마주할 용기가 없었으니까.
그날도 강호에게 사과했지만, 강호도 나도 안다. 그건 사과가 아니라 그저 변명이었다는 걸. 그렇게 유야무야 반년이 지났다. 건널목 씨가 떠올랐다. 일면식도 없는 남을 그리 따숩게 끌어안는데, 엄마란 작자가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이제껏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하지 않은 게 부끄러웠다. 아이에게 열아홉 해 동안 냈던 모든 생채기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랬는데, 미안하다 강호야."
"꽃 아니었지, 몽둥이였지. 하하하!"
해맑은 미소 뒤에, 그저 그렇게 '하하하' 털어내려던 너털웃음 뒤에 아픔을 봤다. 잘못 보다 더 많이 맞았던 아이. 내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해 작디작은 아이에게 입혔던 몸과 마음의 상처를 난 아직도 기억한다. 그런데 강호는 한 수 더 떠서 나에게 당위성을 주며 위로했다.
"괜찮아 엄마, 맞을 짓 해서 맞았어."
내가 이리도 착하고 여린 애에게 뭔 짓을 했나 싶었다. 그런데 또 변명을 했다.
"엄마가 사랑받고 자라지 못해서 표현을 못했어."
눈도 못 맞추고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는 내게, 강호는 따뜻하게 눈 맞추며 그 쓸모없는 변명에 답을 해줬다.
"응, 알아. 그럴 수 있어."
강호는 전 날 잠을 못 자 피곤했고, 난 수술한 발로 서 있기 힘들어 둘 다 반나절 정도 일하고 조퇴했다. 데려다주면서 아이가 말을 다시 꺼냈다. 말로 입은 상처가 훨씬 더 아팠다고. 열아홉 해 살아오는 동안 그때가 가장 아팠다고. 집에 오자마자 톡을 보냈다. 멀리 사는 강호가 집 도착 후에 보낸 톡을 확인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