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을 견디며 존엄을 지키는 법
지금은 전혀 반갑지 않은 청구서 나부랭이 말고 우편을 통해 편지가 올일은 거의 없다.
그땐 혹시나 몰라서 몇몇 친구들의 주소를 받아놓았는데, 다행히도 그사람들을 통해 편지를 보내고 또 기다리면 정기 항공편으로 답장을 받기도 한다. 아무것도 아닌 그 쪽지들이 얼마나 힘이되고 기분이 좋았는지 모른다.
그때 받은 편지들 중 어떤 편지에서 한 시를 받아보았는데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였다.
나따위가 시도 읽을줄알고, 감동하기까지 할 수있다니!!
또 몇몇사람들은 별밤 라디오 공개방송을 녹음한 테이프를 보내주거나 김건모, 부활, DJ Doc등 새로 나온 신보를 테이프로 보내주기도 하였다. 나는 그걸 매일 자는 머리맡에서 테이프 늘어지게 듣고 또 들었다.
지금도 신기한게 내가 출국할때 카세트 플레이어를 가져온 기억이 없었는데 어떻게인지는 모르지만 내 머리맡에 카세트 플레이어가 있는것이었다. 누가 줬는지, 어떻게 내 손에 들어왔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리비아 도착후 대기캠프에서 함께 온 아저씨들중 몇탕을 뛰었는지 감도 안잡히는 고인물 아저씨가 계셨는데 자랑스럽게 아이스박스에 가득채워온 돼지고기를 보여줬는데, 왜 굳이 여기까지와서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이해를 전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의 달수가 채워질 수록 그양반이 그의 캠프에 도착해 받을 대접이 어땠을까 생각해보니 그제서야 역시 고인물의 생존방법은 남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캠프 음식이 전혀 즐겁지 않았던 나는 끝끝내 몇달이 지난 후엔가 장성캠프에서 돼지고기를 넣은 김치찌개를 얻어먹고야 말았다. 그 맛이야 말을해봐야 내가 쓸 수 있는 글로는 표현할 수 없을 경지였다.
또 어떤 아저씨는 죄송스럽지만 전혀 문자와 친해보이지 않는데도 서적들을 그렇게 많이 쟁여왔다. 물론 그양반은 비행기에서도 그 책을 열어본 티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캠프에서 몇달을 생활해 보면서 그분의 깊은 뜻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우리 휴게소에는 비디오와 티브이만 있는게 아니었다. 옆에는 책장이 있었고 그 책장엔 나름 무시못할만큼의 갖은 책들이 비치되어 있었는데 학창시절부터 니코틴과 활자가 없으면 화장실에서 일을 보지 못하는 버릇을 들인 나는 거기서 하나씩 책들을 내 숙소로 들고가 냄새의 희생양으로 삼곤했다.
그나마 볼만한 책(?)이라고 할만한 서적은 세계최고의 계란판 메이커인 JotO일보나 똥x일보에서 만들어내는 월간지였다.
그냥 아무생각없이 담배한대와 그 두꺼운 월간지를 뒤적거리다보면 괄약근 활성화에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월간지이지만 대부분 몇년씩 지난 과월호이고 최신정보라고는 눈씻고 찾아볼라해도 찾지는 못하지만 그냥 저냥 거기 널부러진 그럴듯한 개소리들을 읽고 있으면 시간이 정말 잘 갔다. 이놈들은 내 숙소에 자주 들고가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내고서야 휴게실로 보냈었다.
대기캠프에서 만난 그분도 뒤에올 누군가를 위해 두꺼운 책들을 사다 놓으셨고 나 역시 누군가 남긴 그 책들로 인해 사막의 시간을 그냥 저냥 흘려보낼 수 있었다.
유압반장 C는 막내라인을 형성하던 우리보다 3~4살 형님이었는데 그당시 젊은 반장들로서 우리가 잘 따랐고 우리에게 잘해주었다.
특히 캠프에서 유일하게 노트북을 보유한 최첨단 기기의 소유자였는데 그가 하드디스크에 깔아온 '프린세스 메이커'는 나에게 정말 충격적인 경험을 선사했다.
도트로 찍어 만든 조악한 그래프이지만 게임속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너무 심하게 하는 나머지 정작 컴퓨터의 주인이었던 C반장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다가 이래선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한번에 끊어버렸다.
그깟 점으로 연결된 프로그램따위에 쉽게 마음을 빼앗기고 이 점이 해달라는대로 다해줘야하고 행여 화낼까봐 전전긍긍하는 나를 발견하고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어떤 반장님은 워크샵에서 팔뚝만한 도마뱀을 제법 갖춰진 수조같은곳에 환경을 만들어 주고 키우기도 하고 고슴도치를 기르는 사람, 캠프밖에서 우리가 버린 짬밥을 먹고 대신 우리 캠프를 지켜주는 들개들과 교감을 하는 사람등 동물들을 돌보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나 역시 캠프 초창기에 풀뜯어주면 먹는 이상한 고기를 통해 지나가는 시간을 만들기도 했었다.
사람사는 사회와 철저하게 고립되어 작은 울타리에 갇혀 사는 우리들은 아름다운 시 한수에도 영혼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프로그램에게도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는 한편, 무언가 자기 자신의 환경에서 애정을 쏟을 것들이 필요한, 결핍의 극한에 다다른 약하디 약한 영혼이었다.
한국에서는 응당 누려야 하고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가져갈 수 있는 여러가지 것들이 이곳에서는 그보다 훨씬 못한것에도 감사한 그 무엇이 된다.
이러한 정신적 결핍을 이겨내고 가족들에 대한 책임으로 이들은 몸과 영혼을 깎아내며 그들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귀한 시간과 청춘을 기꺼이 돈과 바꾸는 인생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