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질환 관찰일기 (6)

고요한 욕망

해가 지고 달이 뜨는 날들이 반복되면서 그녀는 어느새 3X의 시작점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새해가 죽음과 동반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고통이었을까, 축복이었을까. 그녀 자신은 훗날 그 시간을 감사하게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한 덩어리의 시간이었다. ‘해피뉴이어’를 외치는 세상에서 분리되어 외딴, 시간의 섬일 뿐이었다. 마치 블랙홀과도 같았다. 쑤욱 빨려 들어갔고, 암흑 속에 있는 듯 했으며, 막막하고 허무하기도 했다가, 종국에는 섬에 갇힌 사람들이 모두 섬 바깥에 존재하게 되었다.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갔으며 죽은 자의 기억을 더듬는 일은 더뎌져 갔다. 그와 같은 일상의 이치 속에서 어떤 깨달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허위에 불과했을 것이다. 다만, 그녀는 생각했다. 시간의 외딴 섬에 머무르지 않았다면 ‘생각’하지 않았을 일이다. 사고(思考)의 발생이 부재하다기보다는 발생이 추후에 이뤄졌을 것이다. 


외딴 시간의 섬에 갇힌 또다른 사람, 그녀를 낳아준 여자가 지쳐 잠든 모습을 고요 속에서 바라보며 몇 달 전 들었던 ‘칠판의 세계’를 떠올렸다. 이것은 관찰일기 5편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것으로, 칠판에 아는 사람의 이름을 스무 개 적은 다음 하나씩 소거해가는 행위를 통해 지향가치를 곱씹게 만든다는 논지이다. 죽음의 문턱 맞은편에서 가족을 배웅하는 사람들에게조차도 눈물을 짜내기가 어려웠던 그녀는, 칠판의 세계를 떠올리는 동시에 슬픔의 감정을 중단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행복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이기적이고 어떤 상황에서는 속물적이다. 순간의 쾌락행복이라고 여기는 그녀는, 행복(쾌락)을 쟁취하기 위해 장애와 수모, 비난에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생각했다. 결국 칠판 테스트의 마지막에서 당신을 지우게 될거야. 그렇게 행동할 거라고 미래가 당연하게 그려지니 쓸쓸해졌다.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인지 혼란스러워졌다.


한없이 빼앗아 내것으로 소유하고픈 욕망과 내것을 해체해 주고싶은 욕망 중 어떤 것이 고귀할까? 애초에 이것들은 비교대상이 맞을까? 그럼 이것은 어떤가. 사랑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과 믿음을 주지 못한 자책감, 둘 중 어느 것이 저급할까? 해답을 찾기 전에 다음의 사례를 살펴보자.


(사례1) 보름달이 곱게 핀 날이었다. 달이 너무 크고 고와 눈을 떼지 못하고 마냥 밤길을 걸었다. 종아리 근육이 땅기고 발목이 시큰거리는데도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걸음을 멈추는 순간 달도 멈출 것 같았고 달이 멈추는 순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눈물 대신 차가운 입김을 내쉬며 커다랗고 하얀 달을 통째로 눈 속에 담았다. 그 커다란 달을 그에게 보내고 싶어 핸드폰 버튼을 누르고 지우고 누르고 지우고 다시 누르고 지웠다. [오늘달참예쁘다] 달은 여전히 밤의 가운데서 숨 쉬고 있었고 문자는 그 기운 속을 두둥실 날아 그의 핸드폰 속으로 쏘옥 들어갔다. 답장은 없었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다가오도록 그는 말이 없었다. 


불교에서는 겁의 시간도 찰나의 시간도 모두 무상으로 수렴된다고 한다. 시간에 있어서 영원한 것도 한 찰나에 불과하다고 해석되는데, 이 논리에 따르면 찰나 속에서도 영겁을 발견하는 기이한 경험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여기서 문제, 위 사례의 미회신 상태는 겁이 될까 찰나가 될까 찰나의 겁이 될까 겁의 찰나가 될까. 


찰나와 영겁 두 키워드로 구글링 했을 때(4.1.) 상단에 노출된 이미지로, 원문의 필자는 조용필 가수의 찰나는 시대를 풍미한 영속성으로 영겁을 지향하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정답은, 싫어병 완치 때 공개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질환 관찰일지 (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