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는 아무 글이나 쓰고 싶지 않은 만큼 아무 글이나 좋아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스스로 적어내린 단어와 문장이 모르는 누군가에게 아무 감상 없이 좋아요를 눌리는 게 어떤 느낌일지 백 퍼센트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더 야박하게 ‘좋아요’를 좋아하지 않았나 보다. 더 ‘좋아’하고 그만큼 공유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타인의 글에 그렇게도 야박한 내담자는 스스로의 글에도 박했다. 글을 내보이는 것이 무서웠다고 고백했다. 1차원적인 감상으로 치닫는 것을 들킬까봐 두려웠다고 한다. 실제로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어 보여, 그의 염려와 불안이 환상만은 아닌 것 같다. 검토, 검증되지 않은 감상 수준의 글을 내뱉는 것이 이 세계에서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역시 자각하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그는 감정이 가미된 글을 더욱 감추고 싶어 했다.
이러한 모습은 내담자의 학문적 글쓰기에도 이어졌다. 사실, 글을 공식적으로 공개하는 공간은 많지 않다.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통해 글을 공개하는 데에도 몇 차례 거절이 있었다고 했다. 하물며 공인된 학술단체의 잡지에 글을 게재하는 것은 이보다 더 조밀한 불쾌감을 제공한다. 학위 논문은 말할 것도 없다. 때문에 내담자의 질병을 완치할 수 있다고 결심하는 것은 불가능한 범주인 것이다.
글 쓰는 것에 재능이 있다고 칭찬을 받은 적 있는 어린 아이는 그것이 정말 자기 것인 줄 알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갈망을 놓지 못한다. 그가 원한 것이 글 쓰기 자체였는지, 완성된 글을 통해 얻는 갈채였는지 알 길은 없다.
해결되지 못하는 것들이 가득해서 어떤 것부터 해결해야 할지 모를때는 펜을 들고 써내려가는 행위부터 추천하곤 한다. 그런데 그에게 이 작업이 어울릴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