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죽음은 느닷없다.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때에도 그러하다. 작년에 데이비드 린치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내심으로 어쩌면 다음에 올 작품이 그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방점은 '다음에 올'에 있다. 가공할 걸작이자 그의 최고작이라고 꼽아도 무방할 <트윈 픽스: 더 리턴> 이후의 작품을—그게 뭐가 되었든간에—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나만 그렇게 믿었던 것은 아닐 터이다. 그 작품의 충격적인 엔딩을 보고 그 이후를 상상해보지 않은 이가 과연 있을까? <인랜드 엠파이어> 이후의 기나긴 공백을 깨뜨릴 만한 장편영화를 기다려보지 않은 이가 과연 있을까? (당시 다음에 올 작품이라고 알려졌던) <위스테리아>가 우리 앞에 펼쳐보일 마법을 기다려보지 않은 이가 과연 있을까?
두말할 나위 없이 데이비드 린치는 현대 미국 영화의 성좌를 구성하는 막강한 시네아스트 중 한 명이었다. <로스트 하이웨이> 이후로 린치가 그 성좌의 한 자리를 실은 오래전부터—<이레이저헤드> 때부터—차지하고 있었음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 클린트 이스트우드, 스티븐 스필버그,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처럼 그와 비슷한 나이대의 거인들이 우리 사이를 거닐고 있었고, 마이클 만과 토니 스콧이 노장답게 묵묵히 작업을 이어오고 있었고, 요나스 메카스, 프레더릭 와이즈먼, 마이클 스노우, 존 카펜터, 아벨 페라라 같은 이들이 흥미진진한 대항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으며, 짐 자무쉬, 샘 레이미, 웨스 앤더슨, 제임스 그레이, 토드 헤인즈와 같은 쟁쟁한 신인들이 하나둘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 중 린치 같은 감독은 아무도 없었다. 동시대의 그 어떤 영화도 <이레이저헤드>처럼 이미지와 사운드를 또렷한 질감을 갖춘 것으로 다루거나, <블루 벨벳>처럼 교외의 빛과 어둠을 전시하거나, <멀홀랜드 드라이브>와 <인랜드 엠파이어>처럼 다양한 현실의 층위를 정열적으로 넘나들거나 하지 못했다.
물론 독창성이 상찬의 주요한 이유가 되기는 힘들다. 개성이 반드시 훌륭한 영화를 담보하는 건 아니기에 그러하다. 실제로 린치의 영화에 대한 의문을 품었던 거물들이 여럿 있다. 장 뤽 고다르는 린치의 이미지는 매혹적이지만 오직 린치 자신을 위해서 말할 뿐이라고 한 바 있고(대조적으로 그의 친구 자크 리베트는 <블루 벨벳>과 <트윈 픽스> 극장판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구로사와 기요시, 아오야마 신지와 나눈 대담에서 린치의 영화는 바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며 빈정댔다(같은 대담에서 칭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투로 그의 영상물 작업인 ‘인터뷰 프로젝트’는 재미있게 봤다고 덧붙이긴 했지만). 반은 옳고 반은 틀린 지적들이라고 할 수 있다.
고다르의 발언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영화라는 매체의 가능성이 오직 개인적 재능에만 달려있는 것처럼 구는 영화감독들에 대한 경계라는 점에서는 부분적으로 옳다. 그러나 린치가 개인적 재능에 모든 것을 걸지는 않았다는 점을 그는 놓치고 있다.
린치의 영화에서, 그가 스스로가 만들어 낸 이미지에 지나치게 오래 머물러 있거나, 그러한 이미지와 이미지 바깥의 세상 사이를 이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종종 있긴 하다(이를테면 <광란의 사랑>이나 1984년판 <듄>, 또는 <로스트 하이웨이>의 몇몇 대목들). 하지만 콸콸 흐르곤 했던 그의 광적인 상상력은 사실 다름 아닌 삶에서부터 뻗어나온 것이었으며, 이는 삶에 대한 린치의 깊은 애정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데이비드 린치의 빨간방>이나 <꿈의 방>을 읽어보면, 우리는 린치가 한 명의 사람으로서 삶에서 얻는 행복과 기쁨을 매우 중시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스트레이트 스토리>와 <트윈 픽스: 더 리턴>의 어떤 에피소드들을 생각해보라. 이 소중한 순간들은 사람들의 일상에 대한 놀라운 관찰력과 세밀한 묘사를 담고 있으며, 스스로에게만 몰두하는 사람이 이런 여유와 세심함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나는 린치가 커리어 전체에 걸쳐 보통의 드라마투르기를 쉽게 택하지 않은 까닭도 여기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린치가 진정으로 중요하게 여긴 삶의 잔여들은 그러한 드라마투르기의 그물망 사이로 빠져나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는 삶은 곧 꿈이라는 흔한 격언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꿰뚫어 본 예술가였다. 삶의 기쁨과 악몽은 일견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하는 듯하나, 알고 보면 둘 다 우리가 상정하는 삶의 노선 바깥에서 틈입해 온다는 점에서, 즉 탈선과 관련있다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따라서 린치의 영화가 동화적 낙천에서 기괴한 악몽으로, 또는 기괴한 악몽에서 동화적 낙천으로 금세 뒤집히곤 하는 것은 변덕 때문이 아니다. 지금은 오롯이 린치를 위해서 말하고 있으므로, 이렇게 덧붙여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데이비드 린치는 우리에게 영화도 일종의 삶임을, 단순히 매혹적이기만 한 환영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삶의 그 모든 양상을 아우를 수 있는 매체가 될 수도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 감독이라고 말이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도발적인 <크래쉬>와 스필버그의 <태양의 제국>의 원작이 되는 소설들을 썼으며, 린치처럼 위대한 몽상가이자 분석가였던 영국의 소설가 J. G. 밸러드는 “작가에게 죽음은 커리어의 또다른 전환점일 뿐”이라고 말한 적 있다. 데이비드 린치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 터이다. 생각해보면, 죽음만큼 린치적인 것도 없지 않은가. 죽음처럼 검고, 삶의 환희를 탁월하게 조명하고, 우리를 그토록 두렵게 만들고, 무수한 환상을 제공하는 것이 없지 않은가. 이쯤되니, 린치의 죽음이야말로 그의 마지막 영화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글쓴이 - 한성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