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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거리두기

소모적인 관계와의 작별

by 캐나다 마징가

고슴도치 딜레마를 통해 사람사이의 적당한 거리의 중요성을 강조한 쇼펜하우어도 세월이 흐르면 인간관계는 한 줌으로 줄어드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올 한 해, 나의 인간관계를 돌아보면, 즐거운 일들도 힘든 순간들도 많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가까웠던 몇몇 지인과의 사이가 자연스럽게 멀어진 일이었다. 이유를 설명하라면 길고 복잡하겠지만, 결국엔 마음이 먼저 닫혀버린 탓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인연을 맺는 일도, 오래된 관계를 놓는 일도 점점 조심스러워진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사람 한 명이 내게서 멀어질 때, 그 빈자리가 예전보다 훨씬 크게 남는다.


처음엔 별일 아닌 듯 시작된 거리감이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그 작은 균열은 어느새 되돌릴 수 없는 간극이 되었다. 일상의 일부였던 사람들을 마음에서 지운다는 건 우리 안의 한 조각을 떼어내는 일이기에 그 관계를 정리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다. 하지만 결국, 나는 손을 놓기로 결정했다. 그건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오래 쌓인 피로 때문이었다. 몇 번이고 실망을 감추려 했고, 믿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신뢰가 무너진 자리에 남은 건 공허함뿐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것은 나를 더 이상 다치지 않게 하려는 내 마음의 마지막 방어선이었을지 모른다.

스탠리 파크의 가을

살다 보면, 사람은 변하는 존재라기보다 시간이 지나며 본모습이 드러나는 존재라는 걸 느끼게 된다.

처음엔 보이지 않던 균열이, 어느 날엔 너무도 뚜렷하게 보이는 순간, 이미 관계는 끝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이젠 다들 조금은 달라졌겠지.’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다시 마음의 문을 열어보지만 그건 결국 더 깊은 상처로 돌아올 뿐, 다시 엮이면, 같은 실망을 되풀이하게 된다는 걸 몇 번의 반복 끝에야 깨달았다. 한편으로는 ‘다시 기회를 주는 게 큰 사람이지’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기도 하지만 그건 넓은 마음이 아니라, 외로움과 추억이 만든 착각일 가능성이 크다. 예의로 살짝 열어둔 문틈 사이로 옛 그림자가 스며드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경험을 반복하게 된다.


나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지만, 다만 멀리 두기로 했다. 미련이 완전히 없다면 거짓말이고 가끔은 그 좋은 시절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 어느 정도 그 문을 닫을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진짜 강한 사람은 끝없이 관계를 이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때로는 단호히 멈출 줄 아는 사람이라는 누군가의 명언이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소모되지 않기 위해서는, 가끔은 잔인해질 용기도 필요하다는...


용서는 과거를 놓아주는 일이고, 허락은 미래를 내어주는 일이다. 그래서 이제 누굴 용서하느냐보다 그 관계 속에서 나의 기준을 무너뜨리지 않는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길 필요를 느낀다. 한 번 무너진 관계를 다시 품는 일은 결국 나를 두 번 무너뜨리는 일이 될 수도 때문이다. 살아보니, 인생은 채워 넣는 기술보다 비워내는 결단에서 완성된다는 말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관계를 줄일수록 마음의 공간은 넓어지고 그 안에서 내 기준이 또렷해진다. 이제는 내 문은 아무에게나 열리는 출입구가 아니라, 내 마음의 온도를 함께 지킬 수 있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문이라는 기준을 갖자.

외로워 보여도 괜찮다. 적어도 더는 소모되지 않으니까.

그게, 내가 다시 엮이지 않겠다고 조용히 다짐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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