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 상실, 자유를 통해 다시 읽는 인간의 조건
“상실은 평생 당신의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당신 마음의 틀을 잡아준다.”
수전 케인의 [비터스위트] 속 이 문장은, 슬픔의 본질을 직설적으로 드러냅니다.
보통 우리는 슬픔을 무조건 피해야 하는 감정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신경과학은 다른 언어로 말합니다.
“슬픔은 뇌의 동일한 보상 회로를 자극한다.
타인을 돕는 연민과, 기쁨을 느끼는 순간이 같은 회로에서 일어난다.”
겉으로 보면 모순입니다.
슬픔은 고통스럽고 무겁습니다. 그런데 뇌는 슬픔을 타인을 향한 연결의 신호로 사용합니다.
픽사의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에서 ‘슬픔이’가 연민을 통해 관계를 회복시켰던 것처럼,
실제 삶에서도 슬픔은 고립이 아니라 공감의 조건이 됩니다.
슬픔은 약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회적 유대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힘입니다.
우리는 왜 완벽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갈망할까요?
[비터스위트]는 이 질문을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인간 조건의 구조로 다룹니다.
완벽한 충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핍은 늘 남아 있고, 갈망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결핍이 예술과 철학, 창의성의 원천이 됩니다.
슬픔과 그리움이 없었다면, 음악도, 문학도, 철학도 지금과 같은 깊이를 가질 수 없었을 겁니다.
“행복하세요?”라는 질문은 결과를 요구합니다.
마치 행복을 얻었는지, 얻지 못했는지 확인하는 검사처럼 다가옵니다.
그러나 [비터스위트]는 말합니다.
행복은 도착지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드러난다고.
사랑은 ‘얻었을 때’가 아니라 사랑하는 중에만 빛을 냅니다.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을 쌓아냈을 때가 아니라, 배우고 탐구하는 순간에만 즐거움이 있습니다.
결핍은 누구에게나 항상 존재합니다.
문제는 그 결핍을 없애려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에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직면의 순간, 이상하게도 자유가 열립니다.
[비터스위트]는 슬픔과 갈망의 가치를 보편화하려 하지만,
때로는 설득과 일반화에 치우쳐 진짜 경험의 결이 옅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한 가지를 명확히 남깁니다.
슬픔은 약점이 아니라, 인간을 단단하게 만드는 힘이다.
상실은 평생 흔적으로 남겠지만, 동시에 마음의 틀을 잡아주고 삶의 경계를 세워줍니다.
슬픔은 끝나는 걸까, 아니면 새로운 힘으로 변하는 걸까?
결핍은 나를 약하게 만드는 걸까, 아니면 자유를 열어주는 걸까?
정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슬픔은 단순히 견뎌야 할 짐이 아니라, 삶을 다시 사유하게 만드는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비터스위트]는 결국 이 질문을 남깁니다.
“당신은 결핍을 없애려 할 것인가, 아니면 그 속에서 자유를 발견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