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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랑 Dec 08. 2023

실무 외국어는 무조건 암기로부터

식사서비스를 하려고 갤리에서 카트를 끌고 복도로 나가는데 좌석벨트 착용 싸인이 켜졌다.

"벨트 매 주십시오. 시-또 베르토오 오시메 쿠다사-이(벨트 매 주십시오)."

거의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을 외치며 복도를 지나가고 있는데, 반대쪽 아일에서 신입승무원이 더 크게 외치며 나온다.

"벨트 매 주십시오. 토-죠-껭오 오미세 쿠다사-이(탑승권을 보여주십시오)."

'???'

오늘 손님 탑승 때 탑승구에서 매니저와 함께 탑승권 검사를 했던 후배라 탑승권을 보여달라는 일본어가 입에 붙은 모양이었다. 나보다 더 당황한 건 일본인 승객들이었다.

"에~에? 토-죠-껭~?

가방과 옷 주머니를 뒤지고 바닥에 떨어진 탑승권을 주워 보여주고 난리다.





신입 교육 때 기내 일본어, 기내 중국어라고 기내에서 많이 쓰는 제2외국어를 배우는 수업이 있다. 한국과 가까운 나라다 보니 일본어와 중국어를 기본으로 하게끔 가르치는 것 같다. 중국인과 일본인은 비행기에서 많이 만나는 만큼 기내에서 서비스하는 내용은 어느 정도 말할 수 있어야 하니까. 수업은 안전에 관해서, 입출국서류와 관련해서, 그리고 식사와 음료, 면세품 구입, 결제에 관해서 등 비행전반에 필요한 상황의 문장만 모아서 암기하도록 가르친다.


기내 외국어 수업 자료. 이 자료가 아직 내게 있다니.


이렇게 문장만 암기한 외국어 때문에 재미있는 상황이 자주 일어난다. 얼마 전 텔레비전 프로그램 장사천재 백사장 2 프로그램에서도 이런 에피소드가 나왔다. 방송에서는 서빙을 맡은 배우(이규형)가 '빵은 소스를 찍어드시면 됩니다.'를 스페인어로 찾아보다가 발음이 너무 어려워서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동료(존박)에게 물었는데, 바빴던 존박님이 정신이 없어 '빵과 소스를 부탁합니다.'라는 뜻의 스페인어를 잘못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문장을 의심 없이 믿고 외운 이규형님은 손님들에게 계속 빵과 살사소스를 부탁하고 다니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져 큰 웃음을 주었다.


실제로 쓰는 문장만 무조건 암기하는 것은 장점도 있다. 빠르게 습득하여 현장에서 써먹을 수 있고, 일하면서 자주 반복하게 되기 때문에 그 문장만큼은 발음이 기가 막히게 완벽해진다. 여기에는 매너리즘에 빠진듯한 말의 속도와 억양도 한몫하는 것 같지만, 당장 한두 번만 실전에서 사용해도 아마 다른 사람이 들으면 일본어나 중국어를 엄청 잘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건 영어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서비스업에서 사용하는 영어표현은 매우 격식 있고 정중하기 때문에 더 잘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 번은 내가 외국인 승객에게 비상구열 좌석 안내를 영어로 하고 그 옆에 한국인 승객에게 비상구 안내를 한국어로 하자, 옆에 있던 외국인 승객이 한국어를 어디에서 배웠냐고 물어보았다. 그리고 한국어가 내 모국어라고 하자 '언빌리버블! 유어 잉글리시 이즈 펄펙트!'라며 놀라워하셨다. 그때는 어깨를 으쓱했지만 글을 쓰는 지금 갑자기 '아, 혹시 내 한국어가 어설펐나?'라는 생각이 드네. 아무튼 내가 평소 영어를 그리 유창하게 하는 편은 아닌데, 그만큼 반복해서 말하는 문장만큼은 입에 붙어 억양도 발음도 자연스러워진 게 아니었을까 싶다.


이렇듯 승무원마다 외국어 실력은 천차만별이지만, 기내에서 사용하는 실무 외국어만큼은 모두가 유창하다. 일반적인 서비스 진행 상황에서는 정말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인지, 단지 그 문장만 외운 사람인지 표시 나지 않는다. 승무원들의 외국어 회화 실정이 이러하니 외국인 승객들은 승무원과 자신의 언어가 통한다고 생각해서 자비 없는 프리토킹을 시작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행히 이런 상황에 대비하여 우리에게도 치트키가 있다.

'니혼진 죠무잉오 욘데 마이리마-스.(일본인 승무원을 불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뚜이부치, 팅부동~(죄송하지만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 말을 못 하는 승무원은 없다. 아마 가장 중요한 실무 외국어가 아닐까? (영어만큼은 양보가 없다. 국제선승무원이 영어로 의사소통이 안된다는 건 양해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 그렇게 말했을 때 손님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웃거나 어떤 중국 손님은 승무원이 거짓말한다고 생각하는지 '여태 다 중국어로 말해놓고 갑자기 팅부동이라니 무슨 소리야!'라며 역정을 내기도 하신다.

가끔 중국인 손님들은 한국사람이 중국어를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 못 하는 것 같다. 영어로 응대를 하면 굉장히 언짢은 표정으로 못마땅해한다. 바로 이웃나라 말이 중국어인데 왜 중국어를 안 배우고 영어를 하냐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것도 그 대단한 중화민족의 자부심인가? 아직도 송나라 명나라인 줄?


재미있는 상황을 벌어지게 하는 주입식 '무조건 암기'이지만 빠른 시일 내에 외국어가 유창해지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성인의 외국어 공부는 이렇게 시작하면 좋을 것 같다. 지금 필요하고 하고 싶은 말들만, 여행 중국어든 무역 일본어든 그 상황에 내가 해야 하는 문장들만 하나둘씩 외워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언어의 베테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유니버스 티켓'이라는 걸그룹 오디션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으로 출연한 김세정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저는 걸그룹한테 그렇게 실력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을 해요. 대신 무대에서 그 실력이 드러나서는 안 돼요. 부족할지언정 완성은 해내야죠. 20초만 부르는 그룹의 멤버일지라도 그 20초 동안만큼은 자신의 실력을 들켜서는 안 돼요.'


공감했다. 그리고 승무원의 외국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손님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도 20초가 채 되지 않는다. 비즈니스클래스는 조금 더 길어지기도 하겠지만.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손님이 불편하지 않고 안심할 수 있도록 프로다운 응대를 해야 한다. 그리고 돌발상황이 발생하여 말이 길어진다면 외국어 능통자의 도움을 요청하겠다는 안내도 자연스러워야 한다. 당황하는 승무원의 태도는 손님을 불안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승무원이 되고 싶어 면접을 보았을 때 임원면접에서 상무님께서 이런 개별질문을 하셨다.

'반기문장관이 유엔사무총장에 당선되면서(이게 언제 적 일이냐!) 외교적으로 한국의 위상을 드높였는데, 승무원은 민간외교관이라는데 박하랑 씨는 승무원이 되어서 어떻게 회사의, 한국의 위상을 드높이겠냐.'

승무원 면접에서 시사 관련 생뚱맞은 질문은 둘 중 하나랬다. 예상치 못한 문제를 앞에 둔 지원자의 태도를 보고 싶거나, 지원자가 마음에 안 들어서 떨어트리려고 그냥 아무 질문이나 던진 거거나.

나는 '나는 중국어와 일본어를 어느 정도 잘 구사할 수 있다. (중국어는 내 전공이었지만, 일본어는 교양수업으로 일본어 1을 수강한 정도였으니 뻥이었다.) 그리고 승무원이 된다면 프랑스어, 독일어 등 다른 외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여 4개 국어, 5개 국어를 할 수 있는 승무원이 되겠다. 그래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비행기를 타는 다양한 외국인들을 그들의 모국어로 친절히 맞아줄 것이고, 그런다면 나 덕분에 그들이 가질 한국의 첫 이미지는 따뜻하고 편안함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내용의 답변을 주저리주저리 했었다.


입사 후 수료식 때 그 상무님은 면접 당시 내 답변을 기억하고 계셨고, '외국어 공부 열심히 해보세요. 이제 어느 나라 말부터 해야 하나?'라며 응원도 해주셨다. 비행을 시작하면서 뱉은 말이 있어 양심상 구몬 일어를 4~5달 수강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끝으로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외국어는 늘어나지 않았고, 그 상무님도 몇 년 후 어떤 일로 인해 회사를 그만두셨다.  



퇴사한 지금은 더 이상 사용할 일 없는 영어, 중국어, 일본어가 조금 아쉽다.

조만간 여행이라도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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