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승무원 면접을 준비할 때에는(라떼는 말이야~~) 키 162cm 이상이라는 신체 자격요건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모든 항공사에서 승무직 지원 자격에 키 제한이 없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아직도 그때와 똑같은 질문을 할까?
지금 항공사에서는 키로 승무직 지원에 제한을 두는 대신 면접 시 지원자의 암리치를 확인하고 있다. 암리치의 기준은 대부분 발 뒤꿈치를 들고 팔을 있는 힘껏 뻗어서 높이 212cm에 닿으면 통과라고 하는데, 무리 없이 닿기 위해서는 긴팔원숭이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 키가 커야 하다. 수치적으로 '키'가 아니라 어느 높이까지 손이 닿을 수 있는지 능력치를 보겠다는 것이지만 결국 큰 키를 승무원의 자질로 본다는 건 똑같다.
그렇다면 '키가 작아도 승무원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뭐라고 대답하는 것이 좋을까? 항공사 입장에서는 신체조건으로 차별을 두는 것은 위법이기에 당연히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학원 관계자들도 한 명이라도 더 학원에 등록해서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세상 어느 누가 그들에게 '키가 작으면 승무원 할 수 없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제로 외항사의 경우 가끔 150 중반정도되는 키로도 합격하는 사례가 있다고 한다.
나는 162cm 제한이 있는 시기에도 161.8~162.4를 왔다 갔다 하는 키로 승무원이 되었다. 일하면서 얼마나 팔을 높이 뻗어댔는지 지금은 키가 163.4~164.2 정도를 왔다 갔다 한다. 한 번도 내가 키 때문에 승무원을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162cm 이상이어야 된다는 신체조건을 보면서도 '난 162cm 정도 되니까 되겠네'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키에 대한 열등감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다. 사실 입사 전까지는 내 키가 작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아니 누구의 키가 크거나 작다는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살면서 키로 인해 불편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승무원이 된 후 내 키는 작은 키가 되었고 불편함이 되었으며 열등감이 되었다. 다른 승무원들은 팔만 가볍게 올리면 닫을 수 있는 오버헤드빈을 나는 뒤꿈치를 들고도 손끝으로 겨우 닫았다. 오버헤드빈에 있는 비상, 보안장비를 확인할 때도 나는 좌석 옆 발받침을 밟고 올라가서 확인을 해야 했기에 비행 전 기내점검을 할 때도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갤리 내 컨테이너를 꺼내거나 넣을 때에도, 컨테이너 내에 물건을 찾을 때에도.. 그렇게 같은 일을 해도 나는 작은 키 때문에 더 힘을 써야 하고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
긴박한 상황에서 오버헤드빈 내에 있는 EMK나 FAK을 기내화를 벗고 좌석을 밟고 올라가서 꺼내야 했을 때, 손님들이 내린 뒤 오버헤드빈 내 LB(left behind의 약어로 두고 내린 물건을 말한다.)체크를 하는 데 다른 존 담당 승무원이 이미 자신의 존을 끝내고 내 존까지 도와줄 때 나는 내 역할을 잘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 정도는 서로 도와줄 수 있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주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는 나도 모르게 위축되었고 그러는 사이 자괴감은 쌓여갔다. 적어도 승무원이라면 손님이 '오버헤드빈에서 뭐 좀 꺼내주세요'라고 부탁을 했을 때 손님보다는 쉽게 꺼내드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승무원이 오버헤드빈에 올린 물건을 꺼내주려고 타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런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작은 키가 열등감으로 느껴진 데에는 외부적인 자극도 있었다. 첫 만남에 '하랑씨는 승무원 어떻게 되었어? 누구 빽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비행 두세 번에 한번 꼴로 '하랑씨, 우리 회사에서 제일 작지 않아요? 나 하랑씨처럼 작은 승무원 본 적이 없어서 그래. 정말 작다.'라며 키가 얼마인지를 물어봤다. 이런 날들이 쌓이다 보니 비행 때마다 업무가 아닌 다른 이유로 주눅 들게 되었고 내가 민폐를 주는 팀원인 것 같아 자격지심은 커져갔다. 왠지 내가 신체적으로 외적으로 승무원이 되기엔 부족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 일 외적으로 알게 되는 사람들에게는 내 직업을 밝히기도 꺼려졌다.
'키 때문에 승무원을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되는 사람이라면 조금 더 멀리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면 좋겠다. 작은 키 때문에 승무원을 못할 건 아니지만, 승무원이 되기만 하면 끝인 것도 아니다. 키가 면접에서의 페널티가 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다른 스펙을 월등하게 키우든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나를 뽑지 않으면 안 되는 경력이나 서사를 만들든 얼마든지 극복가능하다. 승무원 준비생들이 많은 카페에서는 키 작은 지원자들끼리 같은 시각에 지원을 해서 같이 면접을 보러 들어가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지원번호 순서대로 5명~8명이 같이 면접을 보게 되니 괜찮은 아이디어 같다. 아무래도 키 작은 사람들끼리 모여있으면 면접을 볼 때 작은 키가 덜 부각될 것이고 스스로도 덜 위축될 테니까.
하지만 승무원이 된 이후에도 만약 근무하는 내내 내 작은 키가 페널티로 느껴진다면 그것도 괜찮을까? 업무평가나 진급의 결정적 순간에 상대적으로 마이너스 요인이 되어도 극복 가능할까? 승무원이 되어서 몇 년 정도 근무하고 그만 둘 생각이라면 모르겠지만, 보통은 비행하게 되면 회사분위기에 잘 적응을 하고, 때맞춰 진급도 하고 내가 원한다면 정년까지도 근무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작은 키 때문에 근무하는 내내 다른 승무원들보다 더 많은 체력과 시간을 소모하여 내 부족함을 커버해야 한다면?
지금 당장은 승무원만 된다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겠지만, 막상 일하기 시작하면 생각보다 체력 소모가 심하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체력적으로 더 힘든 건 점점 누적될 것이고, 작고 가녀린 이미지로 같이 비행하는 처음 본 상사의 신뢰를 얻지 못한 날들이 평가에 반영되기도 할 것이다. 동료 승무원들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받는 일이 반복되더라도 위축되지 않고 내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까? 간절히 원하는 승무원이 되었더라도 경우에 따라 체력적, 정신적 에너지의 고갈로 스스로 그만두고 싶어질 수도 있다. 꼬꼬마 승준생들에게 희망의 아이콘이 되고 싶지만, 승무원이 된 후에도 작은 키 때문에 일하면서 더 지칠 수도 있다는 건 꼭 미리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무언가 하려고 할 때 '키가 작아서 불리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면, 지금 큰 키가 유리한 집단에 들어가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한자를 잘 모르는데 한의대에 들어갔다면 남들보다 더 시간을 투자해서 한자를 공부해야 하고, 춤을 못 추는데 아이돌이 되고 싶다면 남들보다 춤연습을 많이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키는 더 이상 키울 수도 어떻게 할 수도 없다. 내 노력으로 어찌하지 못하는 조건이 앞으로도 계속 나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면.. 다른 일을 한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텐데 굳이 승무원이 되어서 나의 신체적 부족함을 느끼며 그 갭을 메우려 더 애써야 할까?
'키가 작아도 할 수 있어요'라며 으쌰으쌰 하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인 줄 알지만, 내가 아는 동료 꼬꼬마 승무원들은 많이들 나보다 먼저 그만두었기에 승무원을 꿈꾸기 전 이런 상황들을 미리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조심히 글로 남겨본다.
물론 162cm 정도의 작은 키의 승무원이지만 비행을 즐기며 잘하는 사람도 많다. 본인의 작은 키를 스스로의 캐릭터로 삼아 기죽지 않고 비행에서도 회사생활에서도 프로 승무원의 모습으로 긍정에너지를 내뿜는 모습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존경한다. 승무원을 꿈꾸는 누군가가 '나도 키는 작지만 충분히 잘할 수 있겠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어.'라고 한다면, 그들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다. 나 역시 세상에 다양한 신장과 체형의 승무원들이 있었으면 하는 사람이다.
'ㅇㅇ씨는 승무원 어떻게 되었어? 키가 너무 작은데?'라는 선배의 인신공격에 '저 키 말고 다른 매력이 넘치잖아요~'하며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 남들과 같은 일을 더 힘들게 하더라도 괜찮을 체력과 행동에 민첩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승무원이 되어도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비행의 귀여움을 담당하고 있나 싶은 이달의 소녀 츄같은 깜찍한 후배라면 그까짓 오버헤드빈 선배가 좀 닫아줄 수도 있지 않을까? 작은 키로도 승무원이 되어 롱런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