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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랑 Jan 03. 2024

눈사람 만드는 건 쉽지 않구나

눈의 의미

어린 시절 미국의 미시간 앤아버에서 살았다. 겨울이면 눈이 많이 내려 집 뒷마당에서 썰매를 타기도 하고 언니와 눈싸움도 하고 눈 위에 누워 팔을 허우적하며 천사날개를 만들며 놀기도 했다. 사진이 만들어준 기억인지 정말로 그 순간을 기억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이 오는 건 신나고 설레는 일이었다.

 

한국에 들어와서는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눈이 많이 오지 않는 대구에서 살았다. 가끔 한 번씩 눈이 내려서 신났지만 눈사람을 만들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 내렸다. 바닥에 얇게 한 겹 쌓이는 정도? 친구들이랑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거나, 약간의 눈 뭉치를 만들어 던질 수 있는 정도로만 왔다. 그 정도도 쌓이지 않고 바로 녹는 경우가 더 많았다. 눈은 겨울이 되면 간절히 오기를 바라는 것이었고, 오지 않아 아쉬운 것이었다.


취업을 해서 상경을 한 이후로는 해마다 어느 정도 많은 눈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눈을 기다리지도, 눈이 오는 것이 반갑지도 않았다. 친구들과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눈 소식에 교통체증과 출퇴근 걱정부터 든다면 이제 어른이 된 것이라고.

내리는 순간 잠깐은 예쁘지만, 출퇴근할 때 유니폼 구두를 신고 눈길을 걷는 건 너무 추웠고, 도로에 덜 녹아 질척질척하고 시커먼 눈들은 스타킹을 적시고 돌돌이가방을 적셨다. 비행이 있는 날에는 눈이 오면 '디아이싱과 딜레이'가 운명처럼 함께였고, 쉬는 날에도 약속이 있어 나가서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면 느껴지는 젖은 종이 같은 차갑고 눅눅한 공기가 싫었다. 더 이상 눈을 맞으며 밖을 돌아다니기보다는 따뜻한 곳에서 창문을 통해 바라만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눈은 보드를 타러 갔을 때 스키장에서나 크리스마스날 대형 트리 근처에서 보고 싶은 것이지 일상에서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때보다 더 나이를 먹고 '엄마'가 된 후에는 눈이 오면 좋아하며 신나게 놀 아이들의 모습이 보고 싶어 눈을 기다린다. 아이들과 눈오리를 만들고 눈을 밟고 노는 것이 즐겁다. 물론 눈을 즐기기보다는 아이들의 옷이 젖지 않는지, 추워하지는 않는지 살피고, 벗겨진 장갑을 다시 끼워주고 모자를 눌러주고 풀린 목도리를 다시 동여매 주는 데에 더 신경을 많이 쓰지만.

그리고 내겐 밖에서 눈 놀이를 하고 집에 들어온 아이들에게 따뜻한 핫초코를 만들어 주는 로망이 있었다. 어렸을 때 눈 놀이를 하고 난 뒤 마셨던 핫초코의 따뜻함은 사진이 아닌 내 머릿속에 온전히 남아있다. 그래서 나도 눈 놀이를 하느라 손이 꽁꽁 얼어 집에 들어오는 아이들에게 핫초코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로망이 생겼고, 매년 눈이 올 때마다 그 로망을 실현하고 있다. 어린 시절과는 다른 이유지만 눈이 오는 일이 다시 설레는 일이 되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





지난달 어느 날 제주에 폭설이 퍼부었다. 아침에 첫째 학교와 둘째 어린이집으로부터 각각 밤새 내린 눈으로 인해 아직 도로 제설작업이 되지 않아 통학버스 운행이 어렵다는 안내문자를 받았다. 남편은 사륜구동만 믿고 스노체인도 없이 차를 끌고 출근을 했지만, 첫째 학교는 제설이 되지 않은 좁고 긴 오르막을 올라가야 되어서 차로 데려다줄 수 없었다. 학교에서는 오늘은 등교하지 않아도 출석이 인정된다고 했다. 하지만 폭설이 내린 날은 친구들과 놀기 위해 학교에 가는 거니까. 첫째는 방수장갑 챙겨 눈보라를 헤치고 걸어서 등교했고, 둘째는 오늘 가정보육 하기로 했다.


제주 지인들로부터 자기는 오늘 출근 못 한다고 했다며 여기저기서 그쪽 동네는 괜찮냐며 안부 연락이 왔다. 우리 집은 큰 도로 옆에 있어 눈이 많이 와도 고립되지는 않겠지만, 같은 애월이라도 눈이 오면 고립되는 지역들이 많았는데, 내가 철이 없는 건지 왠지 그런 고립마저 낭만으로 느껴졌다. 학창 시절 내내 눈으로 인한 휴교는 뉴스에서나 볼 수 있던 부러운 일이었고, 어른이 되어서는 '눈 예보가 있으면 평소보다 일찍 나와서라도 늦지 않게 출근해야 된다'고 하는 직장에 다녔던지라, 눈 때문에 출근을 못하고 등교를 안 해도 된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폭설이 내렸지만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춥지 않은 날씨 때문일까, 눈보라를 헤치고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분위기 때문일까. 내리는 눈에 너무 마음이 설렜고 문득 나도 아이와 함께 눈놀이를 하고 싶어졌다. 눈 사람을 크게 만들어보고 싶었고, 눈오리도 만들어 보고 싶었다. 올해는 눈이 와서 즐거워하는 아이들 때문이 아니라 내가 눈이 와서 즐겁고 설렜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차가운 눈이 싫지 않고 좋았다.


1. 눈 오는 뒷 뜰, 2. 눈이 그친 앞마당 그리고 3. 눈오리를 만들겠다고 내복바람으로 나온 폭설로 등원 못 한 둘째


밤새 내린 많은 눈 때문에 셔틀이 운행을 하지 않아 어린이집에 가지 않은 둘째와 눈사람을 만들었다. 눈덩이가 커지면 그렇게 무거워지는 줄 몰랐다. 삼단으로 엄청 큰 눈사람을 만들고 싶었는데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다. 어릴 적 사진들 중에 성인 키만 한 눈사람 옆에서 엄마랑 사진 찍은 것이 있는데, 그건 대체 어떻게 만들었던 걸까? 그 사진을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아마 친정에 있는 것 같다. 눈덩이 하나를 위로 들어 올리는 일 자체가 둘째와 나의 힘만으로는 무리였기에 세 개의 눈덩이만 만들어두고 남편이 집에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눈사람 만들기 위해 눈 굴리는 둘째

 

퇴근한 남편의 도움을 받아 드디어 눈사람이 완성되었다. 완성된 눈사람의 모습에 비웃지 말길. 마음은 나도 울라프를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손재주가 없는 내겐 이게 최선이다. 눈사람 머리 위에 있는 것은 눈오리다. 지금 보니 눈사람 팔도 없네.




겨울이 육지만큼 춥지 않은데 눈은 또 많이 오고.. 어쩜 제주는 겨울도 이렇게 매력적일까? 추위를 많이 타고 추운 걸 싫어해서 겨울이면 집에만 있던 내게 제주의 겨울은 딱 이상적이다. 오랜만에 따뜻하고 포근한 겨울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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