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남자친구 제이와 함께 미국의 마트 홀푸즈(Wholefoods)로 장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미국 마트에도 정육코너가 있다. 정육 코너에 있는 직원에게 원하는 고기 종류와 무게를 얘기하면 직원이 고기를 달고 포장해서 가격표를 붙여주는 게 큰 다를 바 없다.
제이와 함께 나란히 서서 고기를 보다가, 내가 직원에게 고기를 달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주문을 하자마자, 직원은 내 바로 옆에 있던 제이에게 "당신은 무슨 고기 드릴까요?"라고 물어본다.
그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직원은 인종이 다른 우리가 당연히 일행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순간 '남들에게는 우리가 나란히 서 있어도 커플이나 가족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이건 이 사람과 함께하는 한 평생 가겠구나'라는 걸 알았다. 어찌보면 별 것도 아닌 일이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작은 상채기로 남았다.
얼마 뒤 나 혼자 다시 홀푸즈에 식료품을 사러 갔다. 미국 마트에서도 한국인을 탐지하는 나의 눈썰미는 어김없이 발동한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직원에게 물건이 어딨는지 물어보고 있었다. 지나가다가 그녀의 영어를 들으니 아니나 다를까 한국인이 맞았다. (나 포함 많은 한국인들의 영어에는 한국어 엑센트가 있다.)
그녀 바로 옆으로 지나쳐 가는데, 직원과 대화하는 한국인 여성으로부터 약 1미터 정도 떨어져서, 한 흑인 꼬마 아이가 카트를 타고 놀고 있었고 그 옆에는 아버지로 보는 흑인 남성이 서있었다. 아이를 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카트에 치이지 않기 위해 나는 피해 가야 했다. '왜 저렇게 길 막고 멀뚱히 서있는 거야? 아빠가 단속을 해야지'라고 속으로 꿍얼거리며 그들을 지나쳤다.
어느새 나는 장을 다 보고 계산을 하고 나왔다. 바깥은 어둑어둑하고 해는 저물고 있었다. 마트 출구에서 나는 물건이 어딨는지 묻던 그 한국인 여성을 다시 마주쳤다. 그 여성은 누군가에게 한국어로 다정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카트를 타고 놀고 있던 흑인 아이였다. 아이 옆에 있었던 흑인 남성은 카트를 끌고 가서 차에 짐을 싣고 있었다.
순간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와 남성은 그녀의 가족이었다. 그들은 엄마(부인)가 직원과 대화를 하는 사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느라 길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홀푸즈 직원이 동아시아인 여자인 나와 백인 남자인 제이가 커플임을 몰랐던 것처럼, 나 역시도 그들이 가족이라고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식료품을 짊어지고 해 저문 길을 터덜터덜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이 생각났다. 나 스스로 편견에 상처받았으면서, 나 역시 편견에 덮인 눈을 갖고 있었다. 그녀에게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