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에 대하여
라일락. 너희 아빠의 집에, 그러니까 나의 시댁에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가장 놀라웠던 점이 무엇인지 아니? 가족 구성원들 모두 서로를 무지 조심스럽게 대한다는 점이었어. 설마 내 앞이라 낯을 가리나 의심했지 뭐야.
누나가 설거지를 하면 동생인 너의 아빠가 나서고 그걸 본 너의 친할아버지께서 본인이 하신다면서 또 나서고 너의 친할머니는 잠도 안 오는 나를 자꾸 들어가서 자라고 하시고. (난 그렇게 쉽게 피곤해하지 않는단다. 너도 알겠지만 라일락.)
솔직히 약간 충격적인 광경이었어. 평소에 통화를 할 때도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고, 건성으로 의례 건네는 말도 아니었어. 진심을 가득 담아 "I love you." 하면서 통화를 끊는데, 그 말을 시댁에서 나한테도 매번 하니 처음에는 버버벅 거렸지 뭐야. 마치 렉에 걸린 컴퓨터처럼.
가족 간에 이게 가능하니? 부끄럽지만 나는 너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단다.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냐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영어였으면 더 편했을까? 어쩌면 "I love you" 그 음절이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는 낯간지러운 음절보다 더 쉽게 발화될 수 있었을까.
내가 자라온 환경에서는 가까운 사람끼리는 괜히 더 툭툭 거리고, 앞에서는 아닌 척 뒤에서 챙겨주고, 내 입으로는 욕을 해도 남이 내 혈육을 욕하면 분해서 달려들고, 그러다 집에서 만나면 또 티격태격하고 그런 모습들이 소위 일컫는 "현실 남매", "현실 부부"의 모습인데.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너의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댁의 모습은 볼 때마다 새롭구나.
그래. 너를 낳기 전이긴 한데 혹시 우리가 너의 형제자매를 계획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니 라일락. 그때가 되면 너는 어떤 모습이 더 "현실 남매"일 것 같니. 너는 너의 형제자매한테 티격태격하면서 몰래 뒤에서 챙겨줄 거니, 아니면 너의 아빠가 너의 고모에게 대하듯 애지중지 너의 혈육들을 아껴줄 거니.
이 또한 너의 선택이기는 하나 그래도 라일락. 원가족 구성원이든, 연인사이든 남남이 되었든 그 누구를 대하든 관계에서는 항상 존중이 바탕이 되어야 한단다. 네가 존중받고 싶은 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모든 인격을 존중하는 어린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자식은 키우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거라고 너의 친할머니께서 말씀하시던데, 우리가 너에게 많은 좋은 모습들을 보여주고 싶구나.
나는 너의 아빠를, 나의 남편을 최선을 다해 존중할게. 약속한다 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