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귀복 Feb 13. 2024

19. 천재작가, 드디어 백화점에 가다

무명작가 에세이 출간기


"천재작가는 출간의 문턱에서 자꾸 미끄러진다."


원고 투고 이후, 어느덧 받은 거절이 100번이다. 멘탈이 슬슬 짐을 챙긴다. "나는 잠깐 1,530km 떨어진 곳으로 여행 좀 다녀올게" 하고 말한다. 속상하지만 말릴 명분이 없다. 빨리 돌아오기 만을 바란다. 식욕을 잃은 지도 이미 오래다. 두 달 사이 몸무게가 2.3kg 줄었다. 부럽다고? 정신 차려라. 진통제도 하루 한 알에서 두 알로 늘었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다. 멘탈 관리는 삼시 세끼 식사만큼이나 중요하다. 건강보다 소중한 건 없다.


"대한민국 직장인들 사회생활 참 잘한다."


모든 건 귀가 얇은 내 탓이다. 직장 동료에게 "하! 하! 하! 선생님이 글을 쓴다고요? 그럼 나는 눈 감고 떡을 썰겠네요?" 하고 말하며 비웃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없다. 낄낄 거리며 "우와! 웬만한 책 보다 재미있는데요?"라고 말했던 지인들은 본분에 충실했을 뿐이다. 한국인의 정을 필력이라 착각한 내 잘못이다. "책 언제 나와요? 베스트셀러 작가 되셔야죠?"라고 묻는 지인들의 속마음은 다를 수 있음을 늦게나마 깨닫는다. "책 안 나오죠? 그게 그리 쉬운 가요? 그럼 나도 작가 하죠!"라는 본심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듯하다.


"후회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하필 이 시점에, 1년 가까이 희생을 감수한 아내에게 수시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자기야, 까르*에 시계 오빠가 곧 사줄게. 조금만 더 기다려. 베스트셀러 작가 금방 될 거야"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고 떠들어댄 과거의 내가 그저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언젠가는 꼭 대작가님이 되실 거예요"라는 극찬을 전했던 편집자가 돌아서는 순간,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눈치 빠른 우울감이 찾아와 행복감의 자리를 은근슬쩍 넘본다. 결국 홧김에 퇴고도 없이 출판사에 원고를 또 보낸다. 이제 남은 총알은 50개뿐이다. 과감히 40개를 사용하고 마음을 정리하기로 결심한다. 남은 10개는 뭐냐고? 천재작가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삶의 희망이다. 언젠가 다시 투고를 진행할 때까지, 혹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마음 건강을 지켜 줄 중요한 상비이다. 절대 포기할 수 없다.




"투고 연락처를 탈탈 털어 원고를 발송하고 나니 속이 다 후련하다."


격한 감정에 '될 대로 돼라' 하고 저지르고 나니, 오직 한 가지 문제만이 남는다. 내 버킷리스트인 출간은 포기할 수 있으나, 아내에게 호언장담한 선물이 걱정이다. 남아일언중천금이다. 남자의 자존심을 땅바닥에 내던질 수는 없다. 때마침 뉴스에서는 명품 브랜드의 가격 인상 소식이 줄줄이 이어진다. 헉! '까르*에'도 포함되어 있다. 이미 예상가보다 한참을 올랐는데 또 오른다니 믿을 수 없는 현실이다.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던 '희망'이 다가와, "이번에는 꼭 될 거야. 힘내!"라고 다독이며 파이팅을 외친다. 선한 미소를 보이며 응원을 아끼지 않는 희망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믿어보기로 한다.


"100번의 투고, 4번의 기회. 그래, 이제는 될 때도 됐다."


믿을 건 오직 원고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3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다. 3주를 기다려도 받은 회신은 단 3개뿐이다. 3과의 인연이 참 끈질기다. 심지어 천재작가는 생년월일에도 3이 3개 들어간다. 83년 3월 3일. 이쯤 되니 '굿이라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지만, 책을 얻고 부모를 잃을 수는 없으니 포기한다. 왜냐고? 어머니는 권사님, 아버지는 장로님이라는 부캐를 자식 다음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추가 설명은 생략한다.


"140번의 원고 투고, 결과는 상처만 깊게 남은 추억."


작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닌가 보다. 매달 10권이 넘는 독서로 자존감을 높였던 과거가 그리워진다. 옷에 맞지 않는 옷을 입으려 고생한 시간이 아깝긴 하지만 정신 건강을 위해 이쯤에서 꿈을 접는다. 천재작가는 큰 결심을 하고, 다시 독자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이제는 마지막 숙제를 해결할 시간이다."


얼마 후면 결혼 10주년이다. 출간 포기를 선언할 절호의 찬스다. 여윳돈을 계산해 보니, 다행히 시계 값이 딱 나온다. 뱉은 말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다. 로맨틱한 남편의 이미지는 덤이다. 천재작가는 과감히 일을 벌인다. 아내에게 당당히 "자기야. 백화점 갈 준비 해. 시계 사줄게"라고 말한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아내는 "갑자기?"라고 되묻는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지 못할 것 같아'라는 속마음은 감추고, "결혼 10주년이니까 선물로 사줄게"라고 답한다. 아내는 해맑게 웃으며 '베스트셀러 작가 되면 사 준다며?"라고 되묻는다. 천재작가는 속마음을 들킨 듯하여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심하게 흔들린다. 자존심을 포기할 수는 없다.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10주년 선물로는 시계 사주고, 다음에 베스트셀러 작가 되면 러* 팔찌 사줄게"라고 말한다. (슬픈 속엣말) 물론 다음은 없다.




"천재작가는 아내와 딸의 손을 잡고 백화점에 간다."


드디어 긴 여정의 끝이 보인다. 환한 조명이 구매욕을 자극하는 1층 로비에 들어서니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인세를 벌어 아내에게 선물을 잔뜩 사주려는 꿈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주업이 있어 다행이다. 군 복무 기간처럼 훗날 삶에 도움이 되는 경험으로 남길 바랄 뿐이다.


"반짝이는 시계를 바라보는 아내의 눈빛이 반짝인다."


그래 이거면 충분하다. 자존감 높은 아내와 날개는 없지만 본인이 천사라고 굳게 믿고 있는 예쁜 딸이 있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를 찾기가 더 어려운 일상이다. 정성 들여 쓴 원고가 세상의 빛을 보지는 못 하지만 아내에게 빛나는 선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빨간 케이스에 담긴 시계를 쇼핑백에 고이 담는다. 결제를 마치고 매장을 나오는 발걸음이 유독 가볍다. 아내 얼굴에도 미소가 한가득이다.


"천재작가는 아내에게 고백한다."


"자기야, 나 이제 그만할게. 아무래도 작가는 못 할 것 같아"라고 속마음을 내비치니, 아내는 "그래, 자기 즐거웠으면 됐어. 우리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잖아. 난 괜찮아"라는 답을 해준다. 시계 때문이냐고? 아니다. 아내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이해심 많은 여인. 나에게는 과분한 사람. 이런 멋진 여성이 나와 가정을 이루어 주었다는 사실이 늘 감사할 따름이다. 10개월이 넘는 긴 여정이 아쉽지만 이렇게 막을 내린다. 천재작가는 작가의 꿈을 포기하고, 다시 독자로 돌아간다.




"며칠 후, 천재작가는 아내와 둘이 영화를 관람한다."


정말 오랜만이다. 딸아이가 태어나고 난 후 처음으로 보는 영화다. 무려 5년 만에 영화를 감상하면서 천재작가는 비 오듯 눈물을 쏟는다. 왜냐고? '이번에도 4초 광고 후에 알려 주겠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천재작가를 작가로 만들어준 영화의 제목을 쉽게 알려 줄 수는 없다. 궁금해도 참아라. 아쉬움을 즐길 수 있는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얼마 뒤 천재작가가 출판계약서에 서명을 남기는 날, 함께 눈물을 흘려주길 바란다.


"손수건 준비하고 며칠 후에 만나자."

매거진의 이전글 18. 천재작가, 대작가의 눈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