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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it Jan 28. 2024

전설의 시계를 제조한 유통업자

벰페 에비에이터




시계를 산다는 것은 기능, 디자인 그리고 브랜드를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중에서도 브랜드는 지금까지 걸어온 역사와 디자인의 오리지널리티로 결정되는 것 같은데, 벰페처럼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는 물건을 살 때  공부가 좀 필요한 것 같아서 여기저기 찾아본 내용들을 정리해 봤습니다.  


벰페는 1878년 게르하르트 벰페(Gerhard Diedrich Wempe)에 의해 설립된 독일의 오래된 보석상으로 파텍필립이나 브레게 같은 최고급 시계와 보석을 판매하는 유통회사이자 전통 있는 시계브랜드이기도 합니다. 이들 브랜드와 거래를 한 지도 오래되었고요. 


아래 사진과 같이 VC, 예거, IWC, AP 등 유수의 브랜드들이 벰페 로고가 새겨진 리미티드 에디션을 만든 걸 보면 이들 브랜드와의 관계나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벰페 매장은 전 세계적으로 26군데가 있는데, 대부분이 독일을 중심으로 EU의 주요 도시에 위치해 있고, EU밖으로는 뉴욕에 한 군데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뉴욕매장 사진입니다.



시계제작의 역사도 꽤 오래되었지만 현재 그 규모는 작은 독립브랜드 같은 느낌입니다.


2018년도 기준으로 전체 717명의 직원 중 시계를 생산하는 벰페 글라슈테는 24명뿐이고, 연간 생산량도 5천 개 정도에 불과합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판매하는 모델의 개수가 직원의 숫자보다 많다 보니 모델별 일 년 생산량이 몇 개 되지도 않습니다. 


이 시계들은 자체 매장을 통해서만 유통되기 때문에 시장에서의 존재감도 거의 없습니다. 그야말로 유통으로 벌고 시계제작은 취미로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역사를 들여다보면 보통 브랜드는 아닙니다.   


설립자인 게르하르트 벰페가 시계공이어서 처음부터 직접 시계를 만들었었지만, 이 사람은 시계제작보다는 비즈니스에 수완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중고시계 거래로 성공하고 매력적인 디스플레이, 모든 시계를 수리해 주는 서비스, 최고의 고객관리 등을 바탕으로 보석사업으로까지 확장하여 독일 여러 군데에 지점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38년에는 배에 사용되는 해양 크로노그래프회사(Hamburger Chronometerwerke GmbH, 현재 벰페의 고급라인 이름이 여기서 옴)를 인수하여 시계를 생산하고 시계공들을 위한 교육기관도 운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1939년에는 벰페의 시계공장이 군에 편입되었다고 하네요. 


벰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용 파일럿 워치인 B-Uhr(Beobachtungs-Uhr, 관측시계라는 뜻)을 생산했던 5개 브랜드(독일 4개 A.Lange&Sohne, Laco, Stowa, Wempe, 스위스 1개 IWC) 중 하나입니다.   


당시 항공기 개발을 책임지고 있던 RLM(Reichs-Luftfahrt Ministerium, 항공성)에서는 폭격기 네비게이터를 위한 정확한 시계가 필요했습니다. 처음에는 론진과 린드버그가 고안한 시계를 검토하다가 나중에는 누가 디자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B-Uhr 표준이 등장하면서 전쟁 중에 이를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래 도면에서 RLM과 벰페라는 이름이 보이고(벰페가 B-Uhr을 최초로 디자인했을까요? 아무리 뒤져봐도 도면자료는 벰페밖에 안 나오네요), 그 아래에는 당시 생산했던, 지금은 80년 가까이 된 벰페의 B-Uhr 사진입니다. B-Uhr는 시간만 표현된 A타입과 분이 강조된 B타입이 있습니다.



B-Uhr는 벰페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벰페와 스토바는 스위스 무브를 사용하고 랑에와 라코는 자사무브를 장착했는데, 그게 원인인지 랑에와 라코의 생산능력이 정부 요구 수준에 못 미치자 벰페에서 두 브랜드의 시계를 조립하기도 했답니다.


현재는 B-Uhr 스타일을 생산하는 회사들은 많이 있지만, 족보를 따지자면 벰페를 비롯한 독일 4개 브랜드가 디자인 오리지널리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랑에는 B-Uhr를 생산하지 않고, 벰페, 라코, 스토바는 시장에서 그다지 존재감이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스위스 브랜드인 IWC가 독일 디자인을 잘 활용해서 성공했습니다.


B-Uhr가 디자인적으로 굉장히 완성도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독일브랜드에서 B-Uhr를 적극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이유는 시계생산의 중심지가 그동안 동독에 있었고 대부분의 회사가 국유화되어 한동안 명맥을 잇지 못했던 점도 있지만, B-Uhr가 폭격기를 통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전쟁무기였기 때문에 과거를 반성하는 분위기에서 이를 대놓고 돈벌이 수단으로 쓸 수 없었던 것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랑에에서는 B-Uhr를 생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무튼, 전쟁이 지나고 1950년부터 벰페 후손들은 고급시계와 보석유통을 중심으로 다시 사업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독일 경제가 성장하면서 사업도 같이 번창했지만 한동안은 시계를 제작하지는 않았습니다.


독일 통일 직후인 1990년부터 글라슈테를 중심으로 독일의 전통적인 브랜드들과 시계산업이 재건되기 시작했는데, 벰페는 2005년부터 글라슈테 천문대를 매입하고 이를 생산거점으로 활용하여 다시 시계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천문대는 단순히 벰페의 시계공장으로써 뿐만 아니라 독일 시계 역사에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곳 같습니다. 


이 건물은 글라슈테 시계제작협회의 지원으로 1910년경 건립되었는데, 당시에는 원자시계 같은 것이 없었으니까 천체관측으로 시계의 정밀성을 높이는 자료를 얻었다고 합니다.


 1930년대에는 글라슈테 시계산업의 창시자인 랑에 가문과 벰페 가문이 손을 잡고 이곳에 시계제작의 연구 및 교육을 위한 Glashutte Observatory Workgroup을 설립했지만, 2차 세계대전으로 그들의 계획은 실패하고 사라졌다고 하네요.   


그러나 2006년에 벰페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천문대 옆에 Chronometer Observatory를 설립하고 시계의 정확성과 내구성을 측정할 수 있는 장비들을 설치하여 독일 자체 표준(DIN)에 의한 테스트 시설을 만들었습니다. 


현재 이 시설은 작센주의 공기업이 관리하면서 스위스의 COSC와 같이 독일시계를 위한 크로노미터 인증서를 발급한다고 합니다. 


  이런 역사와 의미가 있다 보니 시계 뒤에 이 글라슈테 천문대를 새겨 넣은 것 같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벰페가 시계의 유통시장뿐만 아니라 독일, 특히 글라슈테 시계의 역사에 꽤 역할이 있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이 시계의 디자인과 기술을 이야기할 때 벰페는 시계 산업의 유통과 마케팅(인증시스템도 중요한 마케팅 수단이죠)을 맡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벰페는 시계를 다시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콧대가 높다고 소문난 노모스와 공동으로 자사 무브를 만들어 Chronometerwerke라는 고급 라인을 만들고(벰페의 영향력이란...), ETA무브를 바탕으로 Zeitmeister 라인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계에 Glashutte I/SA(In Saxony, 작센주의 글라슈테란 뜻으로 독일 전국에 있는 22개의 글라슈테와 구분)를 표기하려면 부품의 50% 이상이 글라슈테에서 생산되어야 하므로 ETA무브를 상당 수준 자체 수정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모델들을 보면 벰페만의 독특한 디자인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디자인은 예전부터 있던 전형적인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고, 대신 가격대비 퀄리티 높이는데 중점을 두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들인 에비에이터를 보면 마감도 정교하지만 일오차도 +1초에 불과하여 제가 가진 시계들 중에서는 성적이 가장 우수하네요.



지금까지 두서없이 벰페에 대해 살펴봤는데, 출처가 불분명한 자료를 모으는 과정에서 사실관계가 틀릴 수도 있으니 팩트를 알고계시는 분은 정보공유 차원에서 의견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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