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카쿼츠 IV

아날로그 쿼츠 크로노그래프 (4) 유광 블랙 타키미터 베젤의 시작

Seiko Spirit Chronograph SBPP001(블랙)과 SBPP003(화이트)입니다.

이 시계들을 보면서 20여 년 전에 도쿄에 있는 국립서양미술관을 구경했던 게 생각났습니다.

오래전 일이라 건물이나 작품들은 잘 생각이 안 나는데 특이하게도 미술관 안에 있던 기둥 마감이 인상적이어서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우아한 조명 속에 높이 솟은 기둥이 대리석이라 생각했는데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니 콘크리트로 만든 기둥이라 깜짝 놀랐었습니다. 

근데 이 마감에 대해서는 저뿐만 아니라 이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도 놀랐다고 합니다. 

이 건물을 설계한 사람은 현대건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르꼬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라는 건축가입니다. 

사실 르꼬르뷔지에는 미술관을 노출콘크리트로 계획하면서 왼쪽 사진처럼 거푸집의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본인들 눈에는 그게 너무 거칠고 미완성처럼 느껴졌나 봅니다. 

그래서 거장의 작품에 정성을 다한답시고 히메코마츠(姫小松)라는 종의 소나무를 열심히 갈아 거푸집을 짰고, 결국 오른쪽 사진처럼 대리석같이 맨질맨질한 기둥이 만들어졌습니다. 

르꼬르뷔지에는 준공 후 이 건물에 와본 적이 없지만 일본인 제자들이 보내준 사진을 보고 완벽한 마감에 감탄했다고 합니다.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SBPP001과 SBPP003을 봤을 때 비슷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계의 전반적인 구성이나 형태는 2004년에 발표된 9세대 까레라를 닮았습니다. 

일반적인 저가형 쿼츠 크로노그래프였으면 이렇게 닮은 것으로 끝났겠지만, 이 모델은 정교한 디테일과 빛을 다루는 솜씨를 더하여 Glossy 한 스타일을 만들어냈습니다. 

마치 노출콘크리트를 대리석처럼 만든 것처럼 말이죠.

특히 두꺼운 블랙 타키미터 베젤을 유광으로 마감한 것은 이후에 등장하는 시계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SBPP는 2008년에 Seiko가 주최하는 Power Design Project라는 콘테스트에서 우승을 하면서 여기저기 알려졌고, 다른 브랜드에서는 세라믹을 이용한 비슷한 스타일이 2011년 이후에나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스펙을 정리하면 직경은 40mm입니다. 러그는 손목을 감싸는 모양으로 휘어있고 두께는 7~8mm에 시계무게는 40.5g(러버스트랩을 착용하면 55g 정도)으로 착용감은 굉장히 좋습니다. 방수는 50 atm입니다.

무브먼트는 7T62라는 메카쿼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특징은 6시 방향은 알람기능이 있다는 점인데 알람 소리는 일반적인 전자시계가 내는 비프음과는 달리 미닛리피터 같은 청아한 소리를 냅니다. 

부드러운 크로노그래프 초침의 움직임에 스플릿 기능이 있으며 12시 서브다이얼에서 60분까지 측정 가능합니다. 

이 사진은 출시 당시 가격이 궁금해서 찾아본 건데 2008년 기준 5만 엔이었네요.

세이코는 무브먼트와 시리얼넘버를 알면 제조연도를 알 수 있습니다. 

제 시계는 화이트 모델이 2008년 7월, 블랙모델이 2009년 7월에 제작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안타깝게도 이 시리즈는 발표된 지 2년 만인 2010년에 단종되었습니다.

아날로그 쿼츠 크로노그래프가 처음 출시된 이후 지금까지 Seiko Spirit Chronograph시리즈에서는 많은 모델들이 출시됐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두 시계의 디자인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다른 모델들은 상업적 목적으로 개발되었지만 이 모델들은 콘테스트용으로 만들어져서 명확한 디자인 콘셉트를 가지고 Seiko 특유의 장인정신을 갈아 넣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소나무 거푸집을 열심히 갈았을 때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