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나는 책임감이 강한 편이다. 특히나 남편은 '굳이 저렇게 까지?'라고 느낄 정도로 책임감이 강하다.
그 배경에는 '자랑할만한 대견한 장남'의 포지션이 있었다. 부모님이 호되게 혼내거나 뭐라 하신 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무언의 압박. 어린아이는 기뻐하는 부모님이 기쁨이었고, 못했을 때의 실망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가난 속에서 힘들고 서러워하던 어머님이 기댈 곳은 남편이 아니라 든든한 첫째 아들이었다. 아버님에게 아들은 큰 자랑거리였고 무리한 부탁도 흔쾌히 해주는 첫째 아들은 최고의 아들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자란 남편은 아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한다.
"그래도 괜찮아. 못해도 괜찮아. 그래도 큰일 나지 않아"
남편이 어린 시절 겪었던 누구도 알아주지 못했던 부담감. 누군가 한 번이라도 '그래도 괜찮다'라고 말해줬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한다. 당시에는 조금만 못해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고 한다.
나 역시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언제나 잘해야만 하는 외동딸의 포지션. 그게 나였다. 할머니는 본인이 잘못 키운 아들(나의 아버지)의 잘못들을 내세우면서 너는 믿는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문제점들을 들며 너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나는 할머니의 유일한 손주였다. 아마도 남자손자가 있었다면 뒷전으로 밀려났을 손주. 어디선가 들은 말 중 아주 적절한 단어인 대리효도의 끝판왕이었던 아버지 덕에 매주 일요일마다 만나야했던 할머니는 내 삶의 큰 일부분이었다.
아버지는 반에서 1등 같은 거로는 새끼발톱의 때만큼도 기뻐하지 않았다. 교내경시대회 금상 같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서포트를 따로 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잘했다는 칭찬도 그래도 괜찮다는 위로의 말도 나는 그 어느 것도 들어보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오히려 나는 심한 압박감과 비난과 힐난의 말을 들으며 자랐다. 그러다 보니 무기력증의 끝판왕이었다. 자존감도 없고 안될 것 같으면 쉽게 포기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학창 시절을 보냈다. 뭔가를 하다가도 쉽게 무기력해져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남편도 나도 최소한 "그래도 괜찮아"라는 말을 해주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미 지나버린 어린 시절을 어찌하겠는가. 이젠 성인이 되었고 결혼하여 독립도 하였으니 이제와 원망한들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대신에 우리는 훗날 좌절할 아들에게 꼭 말해주고자 한다.
"그래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