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삶에게 건네는 위로

영화 <햄넷>

by 코울필드


우리는 살면서 많은 눈물을 흘리곤 합니다. 특히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남겨진 이들에게 큰 상실감과 이별의 고통을 주게 되죠. 하지만 슬픔을 받아들이고 표출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릅니다. 누군가는 산에 오르며 울분을 토해내고, 다른 누군가는 바닷가에 멍하니 앉아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슬픔을 애도할 것입니다.


오늘 다루는 영화 ‘햄넷'은 상실에 대한 애도가 예술로 승화되어 삶에 위로가 되어가는 이야기입니다.


마을에서 '숲 속의 마녀'라고 불리는 신비로운 여성 아녜스는 숲 속에서 약초를 따며 매를 부리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아녜스의 집에서 아이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던 작가 은 그녀의 신비롭고도 자유로운 영혼에 이끌립니다. 윌은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 중 하나인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를 들려주고, 그의 이야기에 매료된 아녜스는 윌의 구애를 받아들입니다. 윌의 부모님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둘은 지속적인 사랑을 통해 아이를 가지게 됩니다. 아녜스는 자신의 아이들을 모두 숲에서 낳고자 했지만, 자연의 거센 반항으로 인해 첫 번째 아이 수재나만 숲 속에서 낳게 됩니다.


첫 째 딸 수재나와 쌍둥이 햄넷, 주디스는 부모와 함께 숲 속에서 일련의 시간들을 보내면서 성장합니다. 하지만 평화로웠던 일상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유럽 전역에 퍼진 전염병이 햄넷의 가족에게까지 들이닥친 것입니다. 주디스가 병에 걸리기 전, 윌은 이미 자신의 연극을 준비하기 위해 런던으로 떠난 상태였기에 아내인 아녜스 홀로 이 비극적인 상황과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햄넷은 주디스를 살리기 위해서 사신에게 속임수를 쓰게 되는데, 그 결과 쌍둥이 동생 주디스를 대신해서 죽게 되는 초월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이로써 유일한 아들을 잃게 된 부부의 비극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규칙을 어긴 오르페우스의 비극과 겹쳐지게 됩니다. 윌이 떠난 자리에서 아녜스는 홀로 참척의 슬픔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윌이 뒤늦게 이 소식을 듣고 런던에서 돌아오지만, 아들은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때부터 아녜스와 윌의 사이는 겉잡을 수없이 어긋나게 되고, 둘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써 햄넷을 애도합니다. 아녜스는 아들을 잃은 참혹했던 상황에서 같이 슬픔을 나눌 존재의 부재가 원망스럽고도 비통했을 것입니다. 반면 윌은 아들의 생사의 순간에 자신은 늘 자리에 없었다는 사실에 큰 죄책감을 느끼고 수많은 자책의 밤들을 보냅니다.


다시 런던으로 돌아간 윌은 햄넷의 이름을 건 연극을 엽니다. 런던으로 떠난 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아들 이름을 연극의 제목으로 쓴 사실에 분노한 아녜스는 동생과 함께 연극을 보러 찾아가죠.


하지만 막상 죽은 햄넷과 똑같은 모습의 연기자가 등장하자, 아녜스는 서서히 연극에 몰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죽은 선왕의 모습을 한 남편이 등장할 때 또 한 번 충격에 빠집니다. 윌은 아들 햄릿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해주고 싶었던 말들을 극 중의 햄넷에게 건넵니다. 그제야 그녀는 윌또한 자신과 똑같은 슬픔을 겪고 있었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연극의 마지막 순간에 햄넷은 죽어가고, 아녜스는 햄넷에게 손을 뻗습니다. 그러자 아녜스를 포함한 공연장에 있던 모든 관람객이 햄넷을 향해 손을 뻗는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찰나의 순간 익명의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모습은 마치 인류의 역사를 보는 듯한 기분마저 들게 됩니다.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동질감과 공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공감을 예술로써 승화시킵니다.


서로의 슬픔을 이해하고 자신의 아픔을 받아들인 순간, 윌과 아녜스는 진정으로 햄넷을 그들의 품으로부터 떠나보낼 수 있었습니다. 윌은 자신의 죄책감을 햄넷이라는 연극을 통해 해소했고, 아녜스 또한 윌의 슬픔을 받아들이고 수많은 타자들에게 위로받으며 현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개인의 상처가 예술이 되어서 공공의 위로가 되는 장면은 '과연 예술이 우리들의 삶에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처럼 보입니다. 비록 햄넷은 현실에서는 죽은 몸이지만, 많은 사람에게 이름을 불리며 영원히 예술 속애서 살아갈 것입니다.


이 영화는 셰익스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넷'을 감독의 예술적 상상력을 더해 만들어진 허구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셰익스피어는 영화에서 중심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후반부까지도 셰익스피어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윌이라고 명칭 한 채, 그의 가족 아녜스와 햄넷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햄넷만큼 중요한 신비로운 존재 '아녜스'는 생명과 자연의 신비함을 보여줌으로써 마치 자연의 어머니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영화 초반부에 숲 속 나무 윗둥에서 웅크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태아'를 연상케 함으로써 그 장면은 수재나와 쌍둥이의 탄생과 연결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첫 째 아이 수재나를 숲 속에서 낳은 것과 반대로 햄넷과 주디스는 윌의 집에서 태어나게 되는데,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햄넷이 연극의 배경인 숲 속의 구멍으로 퇴장하게 됩니다. 이는 곧 아녜스와 윌이 아들인 햄넷을 다시 숲 속으로 돌려보내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해석됩니다. 또한 나무 밑동과 동굴은 어머니의 태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영화는 자연과 예술의 거대한 순환을 큰 틀로 잡고, 예술의 역할과 삶의 역할을 자연과 예술의 관계로써 풀어냅니다.


자연의 순환과 더불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건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녜스는 쌍둥이를 낳는 과정에서 난산으로 인해 죽음의 문턱까지 가게 되고, 주디스 또한 햄넷으로 인해 생사의 고비를 넘기게 됩니다. 여기서 동생인 주디스를 대신해서 사신을 속이면서까지 자신의 생명을 바친 햄넷은 마지막 연극 장면에서 윌이 죽은 선왕을 분장한 모습과 연결됩니다. 햄넷이 현실에서 동생을 대신해서 죽은 것처럼, 윌또한 햄넷을 대신해서 예술로써 죽게 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둘의 행동은 곧 죽음과 삶의 위치를 바꿨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계속해서 무언가를 탐구하고 예술을 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 인간의 '필멸성'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은 자연의 시간 앞에서 유한한 존재이며 우리는 그 한정된 시간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족적'을 남기기 위해 발악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햄넷 또한 현실 세계에서는 소멸되지만 예술로써 불멸하게 되어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쉴 것입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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