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구두가 내게 알려준 것
예순셋 할머니의 콩고물 수다
엘에이 날씨답게 저번주도 저저번주도 흐린 날 한번 없이 쨍하게 맑은 날이 계속되더니 하필 오늘 딱 맞춰 하늘엔 회색 구름이 잔뜩 끼고 가늘게 비까지 뿌리고 있었다.
아! 맥 빠지네. 왜 하필 오늘 비가 와?
손녀 생일을 맞아 몇 달 전부터 틈만 나면 이곳저곳 비교해 그중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장소를 물색해 예약하고 맛있는 샌드위치에 샐러드, 거기에 아이가 좋아하는 핑크색으로 케이크까지 맞추어 놓고 은근 손녀보다 더 오늘을 벼르고 기다렸던 딸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풀 죽은 목소리로 창밖을 내다보며 투덜거렸다.
딸의 툴툴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읽은 지 하도 오래되어 제목도 결말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러나 겉표지의 강렬한 빨간색 아기구두 사진만은 여전히 또렷이 기억나는 미국 사는 어느 아기엄마가 쓴 자전적 소설 속 한 대목이 문득 떠올랐다.
막 낳은 아기를 품에 안고 딸은 친정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감격에 겨워 들뜬 목소리로 자신의 출산소식을 전한다.
아버지 제가 지금 막 딸을 낳았어요.
적당한 체중, 노랗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 깊고 파란 눈동자, 앙증맞고 귀여운 열개의 손가락, 발가락들....
우리 아기는 어떤 흠도 없어요.
모든 게 완벽해요. 아버지.
그때 늙은 아버지는 나지막이 딸에게 말한다.
얘야, 이 세상에 완벽한 건 없단다.
몇 년 후 어린 딸이 뇌종양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자 작가는 출산 직후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을 다시 떠올리고 병원 복도에 서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얘야, 이 세상에 완벽한 건 없단다.
어렴풋한 내 기억이 맞다면 후에, 유난히 빨간 구두를 좋아하던 사랑하는 딸을 속절없이 떠나보내고... 남겨진 엄마는 참척의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여 믿었던 신을 원망하고 원망하다 끝내 탈교하고 만다는 매우 슬픈 이야기였던 것 같다.
케이크를 싣고, 샌드위치와 샐러드를 찾아 생일파티 장소로 가는 차 안에서 딸은 점점 어두워지는 잿빛하늘을 올려다보며 날씨가 왜 이 모양이람 쯧. 이러다 비 쏟아지는 거 아냐? 연신 걱정스러워하였는데 그걸 가만히 듣고 있던 오늘로 딱 여섯 살 되는 뒷좌석의 손녀가 무심히 툭 한마디 하였다.
엄마 조금 있으면 맑아질 거예요. 그리고 해가 너무 쨍하면 더울 것 같아요. 구름이 좀 있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요.
그렇다.
당장 흐리다면 곧 맑아지겠지 기대하며 희망을 잃지 않으면 된다.
기다려 보아도 끝내 맑아지지 않는다면 구름이 햇빛을 가려 주어 너무 덥지 않아 좋구나 그리 마음 돌려 먹으면 될 일이다.
누구나 모든 것이 완벽하길 꿈꾸지만...
세상은 어차피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으며
이 세상천지 어디에도 완벽한 것은 없다.
손녀야
이 할머니 육십 년 넘게 살아 보니... 매서운 추위도 세찬 바람도 제 아무리 요란한 천둥번개도 절대 끝날 것 같지 않은 찌는 듯한 더위도 결국 다 지나가더라.
궂은날보다 맑은 날이 몇 배는 많은 이 세상 그럭저럭 한 번은 살아볼 만하더라.
아가,
혹여 살아가다 흐리거나 비 오는 날을 만나게 된다면... 여섯 살 생일 네가 차 안에서 했던 말들을 떠올려 보거라.
그리하면 네 잔은 언제나 넘칠 것이고,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을 것이며, 늘 행복할 것이다.
흐린 손녀의 생일날.
신이 나 흥얼거리는 뒷좌석 손녀의 노랫가락이 쨍하게 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