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선 Jan 21. 2024

인스턴트 애정을 끼니 삼지 말 것

외로움을 견디는 방법은 스스로에게 통제권을 주는 것

선생님께


답글 감사합니다. 편지 속에 적어주신 디저트 가게도 언젠가 같이 먹으러 가면 정말 좋겠어요. 상상만 해도 즐겁네요. 언젠가 제가 광화문 쪽에 놀러 가거든 반갑게 맞이해주실 거죠? 꼭 그러겠다고 약속해주세요.


선생님의 편지를 읽으며 허무함과 외로움에 대해 생각했어요. 저도 그런 감정들과 아주 친밀하거든요. 그 감정들이 허기와 가깝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인스턴트도 끼니가 되기는 하더라 하는 말을 자주 합니다. 제대로 된 애정이 아니어도, 아주 짧거나, 어쩌면 이기적인 애정도 잠시나마 허기를 잊을 수 있게 해준다면 환영한다는 것이지요.


이기적인,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할 때가 종종 있어요. 지난주가 그랬어요. 쉽게 사람을 만나보는 거예요. 쉽게, 친구로. 얼마든지 연인이 될 수 있을 법한 분위기로요. 변명하자면, 이번에는 꽤 오랜만에 해봤어요. 지난 감정을 정리하고 새로운 사랑을 할 때가 됐다고도 생각했고, 지금의 삶이 싫어서 도피하고 싶기도 했어요. 즐거움을 찾아서 몸을 던진 것이죠.


지난 일요일, 피 같은 시간과 빼곡한 마감을 뒤로하고 한 명을 불러냈어요. 밥도 먹고 커피도 마셨죠. 좋은 풍경도 봤어요. 근데 제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어요.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비참해지더군요. 차가운 바람을 많이 맞아서 온몸이 얼얼해진 채 도망치듯 집에 왔습니다. 아무도 없는 집에요. 전기장판을 최고로 틀어두고 그 안에서 잠들었어요.


30분 정도 지나고 나서였을까. 눈을 뜨니 까만 방이 보이고, 사람 목소리 하나 없이 시계 초침 움직이는 소리만 째깍째깍 들렸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모든 게 두려워졌어요. 숨은 턱 막혔고 좌절감이 무거운 이불처럼 제 온몸을 눌렀습니다. 괴로운데도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어요. 도망칠 수 없었어요. 무엇이 그렇게 무서웠을까요. 저는 여전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때 느낀 감정이 마음 깊숙이 숨겨둔 공포심이었다는 것은 확신해요. 그게 오랜만에 고개를 들고 저를 찾아온 거죠.


도망을 가서 그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를 만나면서도 도망을 가고 싶었어요. 인스턴트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 마음은 그걸로 채워지는 게 아니었어요. 오히려 거부하고 또 도망을 갔어요. 만족스럽지 못했고, 죄악감이 들었어요. 어떤 성취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도망만 다니느라 시간을 써버렸다는 죄악감이요.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봐 주셨지요. 저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랑 이야기를 할 때 너무 행복해지고, 사랑 이야기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사람이거든요. 왜 사랑을 사랑했는가 생각해보니, 그게 저를 완전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준 첫 번째 경험이라서 그랬던 듯해요.


사람들 말대로 저는 분명 지금 이대로 완전한 사람일 텐데,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더군요.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구멍이 뚫려서 100을 넣으면 10만 남고 나머지는 다 흘러가 버리는 것 같았어요. 그 남은 10마저도 시간이 흐르는대로 세월에 풍화되어 사그라졌고요. 그래서 나를 사랑하느냐고 자꾸 물었어요. 구차하고 미련스럽지만 저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런 저에게, 가장 사랑하던 사람이 그랬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며, 이 사랑을 네게 주고 있다. 하지만 네가 그걸 흘려보내 버리고 돌아와 다시 달라 청할 때에 나는 상처를 받는다. 내가 주는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여 달라. 그게 내가 바라는 화답이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게 되었어요. 구멍을 메꾸려고 노력하고 다가오는 사랑을 하나하나 충분히 느끼려고 했어요. 그러다 보니 충만함을 느끼는 순간이 잦아졌어요. 이 사랑이 저를 완전하게 한다고 믿게 됐고요. 이 편지를 쓰며 다시 느끼지만, 나아지려고 노력한 사람은 저였네요.


저를 완전하게 한 건 저였어요.


외롭고 힘들 때 이겨내는 방법은 스스로에게 통제권을 기꺼이 내어주는 일인 듯 해요. 원하는 책을 읽거나,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시간을 갖거나, 산책을 하거나. 감정에 통제권을 주는 게 아니라, 제가 오롯이 그 통제권을 갖는 거에요. 그때 비로소 나를 온전히 인식하고 완전해지는 것 같아요.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타인의 비난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나를 보호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시간이 갈수록 제가 어떻게든 살아내는 게 신기해요. 분명 언제고 부러질 것처럼 살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꺾이는 듯하다가도 다시 살아내는 게 신기해요. 주변을 둘러보면 사람들이 다 그러고 살더라고요. 저는 사람들이 신기해요. 제가 그중 하나라는 것도 신기하고요. 결국 우리도 여태 그래왔겠지요. 그렇다면 얼마든지 또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나요. 저는 무척 기대가 돼서요, 선생님께서도 그러시다면 좋겠습니다.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어요. 저는 오늘 잠시 산책을 다녀와 할 일을 이어가 보려고요. 이번 주 일요일은 도망가지 않고 온전히 살아내겠어요. 선생님도 일주일을 무사히 마무리하시고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2021년 1월 30일


선선 드림

매거진의 이전글 너의 애착 가방이 되고 싶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