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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카치나 Apr 07. 2024

리뷰)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르포르타주. 1995년에 옴진리교가 일으킨 도쿄 지하철 사린 가스 테러를 중심으로 1권은 피해자, 2권은 옴진리교 신도의 인터뷰를 다루고 있다.


    1995년 3월 20일 월요일 아침. 사람들로 꽉 찬 지하철 한가운데에 독성물질 사린이 들어있는 봉지를 옴진리교 신도들이 터트렸고 수천의 피해자와 십여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평화롭다고 생각되던 일본에서 사이비 종교에 의해 일어난 일반 시민을 향한 무차별적인 테러는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피해자는 어떤 사람들인가. 가해 집단인 옴진리교는 어떤 사람들이 모인 것인가. 이런 평가는 본문에 수록된 여러 사람의 인터뷰, 혹은 그 외의 자료를 보고 본인이 직접 판단해야 할 문제이지 누군가 필터링하여 제시할 내용이 아니라 생각한다. 그보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바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제시한 사회적 맥락이다.





    일본의 대대적인 사회 운동은 1950년대 말의 미일안전보장조약에 반하는 안보 투쟁으로부터 시작되어 1960년대의 학생 운동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1960년대가 끝나갈 무렵, 운동은 시들해지고 대다수 사람은 변혁을 이야기하기보다는 당시 일본의 경제적 풍요로움에 몸을 맡겼다. 이렇게 이상과 변혁을 위한 열기가 식어버린 시기 이후에 성인이 된 세대를 시라케 세대라 칭한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이념을 중심축으로 타인과의 연대를 지향할 수 있었던 이전 세대와 다르게, 굳은 사회에서 시라케 세대는 남들과의 차별성을 추구했다. 하지만 이들이 추구하던 개인주의는 사회의 암묵적인 규칙의 범위를 넘어설 수 없었다. 당시 일본 사회의 개인주의란 소위 남들보다 튀면 안 된다는 눈치 아래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차별성은 건설적인 자아 형성보다는 물질적인 추구로 기울었다.


    이상론에 관한 이야기가 더 이상 불가능하고, 사회는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가 부유해지면 개인도 풍요로움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사회적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어도 되는가?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땅값은 나날이 높아지고 내 집을 마련하기에는 턱도 없어 보인다. 보장된 미래란 정말 존재하는 것인가?


    문제는 사회가 No를 외치는 사람을 받아줄 서브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들 아침 일찍 만원 전철에 몸을 맡기고 밤까지 일하는 사이클에 따르지만 내 집 마련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내면 돌아오는 대답은 다들 열심히 일하는데 왜 분위기를 흐리냐는 핀잔이다. 그렇기에 막연한 불안감을 다들 품속에 간직한 채 매일매일을 반복할 뿐. 가시적인 목적성은 사라지고 사회화가 더 이상 자명한 선이 아니게 되었지만, 틀에서 벗어나기란 매우 두렵다. 답답한 상황에서 물질에 대한 집착만이 일종의 탈출구이다.


    이 상황에서 옴진리교는 종교적 논리로 공허함에 답을 가져왔다. 저차원의 논리와 언어로 무장한 대답은 완결성을 가진 유토피아를 제시했고, 일부는 이에 이끌려 교단에 들어가 현실을 배제하고 폐쇄된 공간에서 자신들만의 사회를 구축했다. 현실이 아닌 픽션에 가까운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람들은 사회의 모든 걸 버리고 교주에게 사고를 의탁했다. 그리고 옴진리교의 몸집이 점점 커지며 폭주하던 교주는 외부의 악을 상정해 최악의 테러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사회적 맥락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실행범과 옴진리교에 대한 일방적 연민이 아니다. 중요한 점은 일련의 사건이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사람들이 일으킨 범죄가 아니라 엄연한 사회 구성원이 사회의 문제로부터 촉발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반사회성을 강조하며 우리와 저들 사이에 일종의 선을 긋고 다른 존재로 인식하는 사고를 하루키는 염려한다. 사회 구조에 대한 성찰이 아닌 일반 사람들과 동떨어진 자극적인 부분에 집중할수록 문제로부터 더욱 멀어질 뿐이다.


    일본처럼 집단적인 테러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가 사는 사회에도 작은 수준에서 비슷한 문제가 꾸준하게 일어나고, 반응 또한 비슷하다. 자극적인 부분과 반사회성이 집중되고 어느새 선이 그어져 범인은 사회 구성원이 아닌 다른 세상의 사람이 되어버린다. 위에 서술한 하루키처럼  또한 범인에 대한 일방적 연민을 주장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단지 이 문제가 사회 안에서 발생했다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지 않으면 비슷한 일이 계속되어 반복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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