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국 Mar 05. 2023

[44] 김동주 놓치고 심정수 잡고…류지현 대신 류택현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94 프로야구 판도는 4강4약의 뚜렷한 대조가 예상된다. 4월 9일 개막전을 20여 일 앞둔 13일 각 구단 사령탑-해설가들은 올 시즌 우승 후보로 한결같이 해태-삼성-OB-한화 등 4팀을 지목했다. 반면 주전 대부분이 군인이 된 롯데, 핵심 내야수 송구홍 김동수가 입대한 LG는 약세가 점쳐지며 쌍방울 태평양도 하위권을 면치 못할 것으로 분류됐다.』 <1994년 3월 14일자 조선일보>


『올해 프로야구는 지난해 우승팀 해태, 준우승팀 삼성, 3위 OB, 빙그레에서 이름을 바꾼 한화 등이 4강권을 이루면서 우승을 다툴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1994년 4월 4일자 한겨레>


1994년을 앞두고 OB 베어스는 장밋빛 꿈에 부풀어 있었다. OB 내부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이나 각 언론에서도 1994년 전망을 다루며 모두들 OB를 4강권으로 꼽았다.


1990년과 1991년 2년 연속 최하위의 수모를 당했던 OB는 윤동균 감독이 정식 사령탑에 오른 첫 해인 1992년 탈꼴찌를 넘어 5위로 치고 올라갔다. 그리고 집권 2년째인 1993년에는 3위로 뛰어올라 1987년 이후 무려 6년 만에 포스트시즌 무대에 진출하는 감격을 누렸다.


비록 1993년 준플레이오프에서 LG에 1승2패로 밀리면서 탈락했지만, 나름대로 수확이 컸다. 무엇보다 기나긴 암흑기를 벗어나면서 선수들이 패배의식에서 빠져나왔다는 점이 반가웠다. 큰 경기 경험을 통해 자신감도 찾았다.


1993년 팀 평균자책점(2.88) 1위. 타선만 조금 분발한다면 OB는 1994년에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 팀으로 분류됐다. 그러니까 한국시리즈 진출도 꿈만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베팬알백] 44번째 주제는 1994년 준비 과정으로 화제가 됐던 신인 스카우트와 선수단 변화 이야기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OB로선 1982년 원년 우승 이후 12년 만에 우승을 그리며 선수단을 빠르게 정비해 나갔다.


1994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1차 지명된 류택현 ⓒ두산베어스


스카우트 이야기 ①유지현 대신 류택현 1차지명


1993년 11월 4일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실. 잠실 라이벌 OB와 LG는 1994년 신인 1차지명을 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다른 팀들은 11월 5일 1차지명 선수를 발표하지만, 잠실구장을 나눠 쓰는 서울의 두 팀이 지방의 6개 구단보다 하루 먼저 1차지명 선수를 가렸다.


양 팀 모두 원하는 선수가 같으면 주사위 던지기를 해야 하는 상황. OB와 LG가 원하는 선수의 이름을 적어 넣은 편지 봉투를 교환한 결과 LG는 한양대 유격수 유지현(현 LG 류지현 감독)을, OB는 동국대 좌완투수 류택현을 엇갈리게 선택했다. 잠실 라이벌끼리 주사위 던지기도 없이 1차지명 주인공이 가려진 것은 그해가 처음이었다.


OB로서는 당시 늘 좌완에 대한 갈증을 안고 있었다. OB가 서울에 입성한 이듬해인 1986년 신인 대상자부터 1차지명 우선권을 가리는 주사위 던지기가 시작됐는데, OB는 1986년과 1989년 딱 두 차례 승리했을 뿐이었다. 1993년까지 ‘주사위 전적’ 2승6패로 밀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두 차례 승리에서 뽑은 좌완 투수들의 실적도 좋지 않았다.


1986년에는 OB가 왼손잡이로 투타 만능인 아마추어 최대어 박노준(고려대)을 먼저 뽑았지만, MBC 청룡이 선택한 김건우(한양대)는 첫해부터 무려 18승을 거두며 신인왕에 올라 OB의 마음을 쓰라리게 했다.


박노준은 아마추어 시절의 명성을 이어가지 못했다. 3년간(1986~1988년) 투타를 병행했는데 이 기간 투수로는 43경기를 뛰며 5승7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3.13을 기록했을 뿐이었다. 사실상 입단 이듬해부터 타자에 더 무게를 뒀지만 OB 유니폼을 입고 활약한 1991년까지 타자로서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1989년에 OB가 다시 우선권을 쥐고 좌완 투수 이진(성균관대)을 1차지명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한 카드가 돼버렸다. 대학 시절까지 무명이었지만 잠재력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이진은 첫 해 7승을 올리며 가능성을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1993년까지 통산 10승10패2세이브에 그친 뒤 유니폼을 벗었다.


오히려 후순위의 MBC가 1차지명한 김기범(단국대)은 국가대표 출신답게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LG 왼손 마운드의 한 축을 이뤘다.


1990년부터 1993년까지는 주사위 던지기에서 모두 패하면서 우선권을 LG에 넘겨주는 비운을 겪었다.


LG는 1990년 한양대 포수 김동수, 1991년 건국대 내야수 송구홍, 1992년 휘문고 투수 임선동, 1993년 고려대 투수 이상훈을 먼저 지명해 팀 핵심전력으로 키웠다.


반면 2순위가 된 OB는 1990년 한양대 내야수 임형석, 1991년 한양대 내야수 황일권, 1992년 경기고 투수 손경수, 1993년 건국내 1루수 추성건을 1차지명했는데 이들 중 성공한 선수는 없었다.


1994년 신인 1차지명. 서울 지역에서는 아마추어 시절 명성만 놓고 보면 국가대표 내야수로 활약한 유지현의 이름값이 더 높았던 게 사실이다. 만약 OB가 유지현을 선택한다면 다시 LG와 주사위 던지기를 해야 할 가능성이 커 보였다. 그러나 OB는 대학 시절까지 혹사를 당하지 않은 싱싱한 어깨에 시속 140㎞대 빠른 공을 보유한 류택현의 발전 가능성에 더 주목했다


OB 선수 구성상 당시 내야수보다는 좌완투수가 더 시급했다. 내야수는 그런대로 구색과 신구 조화가 이뤄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테스트를 받고 입단한 김민호가 1993년에 주전 유격수로 혜성처럼 떠올랐고, 이명수 임형석 황일권 안경현 등이 내야진에 포진해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993년부터 베어스 주전 유격수로 자리매김한 김민호 ⓒ두산베어스


OB 스카우트팀에서 “우선권을 쥐면 유지현을 잡고, 상황에 따라 기존 내야수는 트레이드 카드로 쓸 수도 있다”는 보고서를 만들기도 했다. 그만큼 대학 4학년 때 팔꿈치 부상으로 송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고는 해도 유지현은 놓치기 아까운 카드였다.


그러나 윤동균 감독은 팀에 좌완투수가 더 필요하다고 봤다. 무엇보다 윤동균 감독이 짬을 내 동대문구장을 방문한 날, 동국대 4학년 류택현이 기막힌 투구를 한 것이 1차지명 주인공을 굳힌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반대로 LG에서는 스카우트팀이 류택현을 1차지명 후보로 올려놓고 보고서를 작성했다. 유지현의 팔꿈치가 좋지 않아 유격수로 활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를 틀어버린 것은 LG 이광환 감독이었다. 충암고 1학년 때 한일고교대회 대표팀에 뽑히고, 고교 3학년 때 국가대표로 선발될 정도로 야구센스만큼은 타고났다는 판단이었다. 강견은 아니지만 스텝이 빠르고 공을 빼서 던지는 시간이 짧아 약점을 만회하고도 남는다는 봤다. 대학 시절엔 국가대표 팀에서 유격수 이종범-2루수 유지현 키스톤콤비가 가동됐기에 송구력에 문제가 발생하면 LG에서도 2루수로 활용하면 된다는 계산이었다.


역사에서 가정법은 필요없다지만, 만약 OB가 유지현을 1차지명했다면 1990년대 OB 내야진의 지형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스카우트 이야기 ②김동주 놓치고 심정수를 잡다

동대문상고 출신으로 1994년 OB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한 심정수 ⓒ두산베어스


1993년 한양대와 ‘이중등록’ 파문 속에 초고교급 타자 강혁을 놓친 OB로서는 1994년에 입단할 고교 유망주에게 다시 눈길을 돌렸다. 당시 OB와 LG는 고교 특급선수를 놓고 과열되는 스카우트 싸움을 피하기 위해 서울지역 고교 팀을 분할해 고졸연고 지명을 하기로 했다.


OB 관할 고교팀 중 최대어는 배명고 김동주. 고교 2학년 시절부터 투타에서 두각을 나타내 스카우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타자로서 정교함과 장타력을 갖췄고, 투수로서 시속 140㎞대의 묵직한 구위를 자랑했다.


2학년 시절에 배명고는 전국대회 3관왕(봉황대기, 황금사자기, 전국체전)에 올랐는데, 김동주는 봉황대기에서 최우수투수상과 타격상, 타점상을 휩쓸었다. 당시 동대문구장에서 투타에 걸쳐 맹활약하는 김동주를 본 일본 다이에 호크스(현 소프트뱅크) 관계자가 “일본에 있으면 당장 1억 엔(약 10억 원)의 계약금을 받을 수 있는 대물”이라고 놀라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프로와 대학 사이에서 스카우트 표적이 된 김동주는 배명고 3학년이 되자마자 행선지를 정한다. 1993년 봄, 일찌감치 고려대와 가계약을 해버렸다. 4월 27일 부모와 함께 고려대체육위원회 사무실을 찾아 최남수 감독 등이 배석한 가운데 기자회견을 하며 고려대행을 선언하기까지 했다.


1993년 안정된 마운드에 비해 타선의 힘이 부족했던 OB는 김동주에 대한 미련을 거둘 수는 없었다. 시즌 도중에도 김동주에게 끈질긴 구애 공세를 펼쳤다. 김동주의 마음도 잠시 흔들리는 듯했다.


프로-아마 협정에 따라 프로 팀의 고졸 선수 계약은 11월 1일부터 15일까지. OB는 다시 한번 역대 고졸 최고 대우를 약속하며 마지막 반전을 노렸다. 그러나 김동주는 11월 4일 아버지와 함께 고려대로 찾아가 이날부터 시작된 마무리훈련에 참가함으로써 진로를 명확히 했다. 전년도에 고교 최대어 강혁을 놓친 OB로선 다시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그러나 OB 관할 고교 내에 또 다른 대어가 있었다. 동대문상고(현 청원고)의 심정수였다. 당시 동대문상고의 전력이 약해 심정수는 고교 무대에서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야구판의 ‘꾼’들 사이에서는 잠재력 면에서 소문이 났던 유망주였다.


심정수가 처음부터 눈에 띈 것은 아니었다. 고교 2학년 여름까지만 해도 키 175㎝에 몸무게가 68㎏에 불과할 정도로 체격도 왜소했다. 포지션도 2루수와 유격수를 봤다.


1993년말 OB베어스는 김동주를 놓쳤지만 심정수 영입에 성공했다. ⓒ두산베어스


그런데 그해 가을 완전히 다른 몸매로 나타났다. 매일 3개씩의 우유를 마시고, 찐감자와 찐계란을 도시락처럼 싸들고 다니며 몸을 불리고, 웨이트트레이닝에 매달린 결과였다. 단 몇 개월 만에 키가 180㎝로 커지고 몸무게도 92㎏로 탄탄해졌다. 역삼각형의 상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훗날 ‘헤라클레스’로 변신하는 변곡점이었다.


OB 스카우트 팀에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심정수도 고교 졸업 후 곧바로 프로에 가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심정수 아버지가 대학행을 원하며 격렬히 반대했다. 아버지는 OB 스카우트만 보이면 “얼씬도 하지마라”며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 심정수는 스스로 나서 아버지를 설득했다. “지금 프로에 가지 못하면 아예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고집을 피워 결국 허락을 얻어냈다. OB도 당초 계약금 3000만 원을 책정했다가 계약금 3800만 원과 연봉 1200만 원, 합계 5000만 원을 채워줬다. 당시 OB 구단 역사상 고졸 신인 타자 최고액 대우였다.


심정수는 1994년 프로 적응기를 거친 뒤 1995년 21홈런을 기록하며 OB 베어스의 새로운 거포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95년 우승에는 홈런왕과 MVP로 우뚝 선 김상호의 반전이 가장 큰 터닝포인트로 기억되지만, 사실 ‘소년장사’ 심정수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얘기는 또 달라졌을지 모른다. 0.5게임차로 LG를 누르고 극적인 페넌트레이스 1위를 차지한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심정수는 먼저 프로에 적응을 한 뒤 4년 후 OB에 입단한 김동주, 외국인선수 타이론 우즈와 함께 훗날 ‘우동수 트리오’를 형성하며 KBO리그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최강의 중심타선을 구축했다.


1994년 OB의 최대 수확은 차세대 거포 심정수의 프로행이었는지 모른다.


OB는 그 외에 1994년 신인 드래프트 2차지명에서 1라운드 우완투수 홍우태(성남고-계명대), 2라운드 포수 김광현(신일고-단국대), 3라운드 사이드암 투수 한태균(광영고-연세대) 등을 선택했다.



베테랑 좌타자 김광림, 쌍방울 강길용과 트레이드

트레이드로 베어스 유니폼을 입은 강길용 ⓒ두산베어스


1994시즌을 앞두고 OB 내부 전력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1993시즌 직후 11월 23일 3할 타자 김광림을 최동창과 묶어 쌍방울에 내보내고, 쌍방울 주력 투수 강길용을 영입하는 트레이드를 단행한 것이었다.


쌍방울은 1번타자감이 필요했다. 좌타군단인 OB는 1984년부터 활약해 온 베테랑 간판타자 김광림을 내주고서라도 선발과 중간으로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는 우완 강길용을 통해 마운드를 더 탄탄하게 만들겠다는 복안이었다.


그러나 이 트레이드로 인해 OB는 골든글러브 암흑기 역사를 끊어내지 못하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김광림이 1993년 12월 11일 열린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외야수 부문 2위로 황금장갑을 받았지만, 한 달 전 쌍방울로 트레이드된 까닭에 OB가 아닌 쌍방울 선수로 집계된 것. 그해 활약은 OB에서 했지만 소속팀이 쌍방울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OB는 1985년 외야수 박종훈을 끝으로 1986년부터 골든글러브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로써 8년 연속 황금장갑 무관에 그치고 말았다.


OB로선 어쨌든 새로운 방향으로 팀을 정비해 나갔다. 목표가 우승 도전으로 잡혔기에 윤동균 감독을 비롯한 선수단 내에도 1982년 이후 12년 만에 우승을 재현하려는 에너지가 넘쳤다.


무엇보다 마운드가 철옹성 같았다. 1993년 10승 이상을 올리며 희망의 불을 지핀 ‘영건 트리오’ 김상진-강병규-권명철에다 쌍방울에서 7승을 거둔 강길용이 새롭게 선발진을 구성했다. 전년도에 평균자책점 1.11을 기록하며 선동열급 마무리투수로 떠오른 김경원을 중심으로 한 불펜진도 탄탄해 보였다. 여기에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장호연과 박철순도 뒷받침하고 있었고, 신인 류택현과 홍우태도 기대를 모았다. “마운드만큼은 해태도 부럽지 않다”는 전문가들의 평가가 짜장 허황된 소리로만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야구는 계산하는 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OB는 1994년 초반부터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구단 역사상 가장 아픈 시련을 겪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 [43] ‘천재타자’ 강혁, 이중등록과 KBO 영구실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